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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 4권




4권은 오로지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이렇게 중요한 영웅인걸 모르고 살았다.
제우스와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헤라의 영광이라는 의미)
12가지 과업을 수행하고 나중엔 올륌푸스의 신의 자리에 오른다.
이 12가지 과업이란 것은 현대인인 내 시선에서 보면 좀 유치하지만,
당시의 사자, 뱀, 소들의 인간의 목숨을 뺏을 수 있는 험악한 동물일테니, 헤라클레스는 힘이 센 영웅이 맞다.
 

<49쪽~50쪽>나는 손에 몽둥이를 들고 어깨에는 사자 가죽을 두른 헤라클레스 석상을 보면서 이렇게 상상해보고는 한다. "헤라클레스의 몽둥이에는, 인류의 오래된 기억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 몽둥이를 처음 써보았을 때의, 그 아찔하게 황홀하고 신통방통했던 기억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자 가죽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처음으로 짐승의 가죽을 몸에 둘렀을 때의, 놀랍게 따뜻했던 석기시대 기억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헤라클레스 신화에는 문명시대 이전 인류의 추억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영웅신화는 흔히 인간이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의 과정으로 해석된다.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이야기를 읽었지만 많은 등장인물과 낯선 지명들이 버겁기도 했다. 
그럴때 4권의 아래 문장을 떠올리면서 곁가지, 아기자기함을 기억하기로 했다.

<57쪽>
곁가지로 자꾸 새면 서사 줄거리가 어수선해 질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신화는 큰 기둥줄기의 곁가지에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히 매달려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115쪽>
그러므로 영웅을 영웅이게 하는 것은, 오랜 방황과 모험 끝에 그가 누리게 되는 행복이 아니다. 영웅의 모험은 행복에 이르는 도정이 아니다. 영웅의 행복은 또 다른 모험을 준비하는 순간의 짧은 잠과 꿈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잠자고 오래 꿈꾸는 자를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잠과 꿈을 깨우는 자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135쪽>
헤라클레스는 ‘미덕’의 길을 따르기로 했다. 앞에는 험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1.네메아의 사자, 그 사자 머리가죽을 뒤집어씀, 헤라클레스 스타일 완성
2.물뱀 휘드라
3.암사슴
4.멧돼지
5.소똥 치우기
6.새떼 쫒기
7.크레타의 황소
8.데오메데스의 암말 붙잡아오기
9. 아마존의 허리띠 가져오기
10.오뤼테이아 소떼 찾아오기
11. 황금사과 따오기
12.케르베로스 데려오기
 
이 12가지 과업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래 문장은 아르고스 왕이 하는 말인데, 아르고스 왕이 없었으면 난 평생 이해 못했을 것 같다.
 

<316쪽>헤라클레스여, 강보에 싸인 채 뱀을 목 졸라 죽였다는 헤라클레스여, 네메아의 사자, 물뱀 휘드라, 에뤼만토스의 멧돼지를 죽여 괴악한 짐승드을 저만치 무찔러 놓았으니 백성들이 좋아하겠구나. 헤라 여신의 현몽으로 그대에게 과업을 맡겼으되 나는 그 뜻을 일일이 알지 못한다. 백성들은 그대가 케뤼네이아의 암사슴을 사로잡았을 때는 신들과 화해하는 길을 열었고, 스튐팔로스의 새들을 쫓았을 때는 전쟁신의 한쪽 날개를 꺾었다고들 칭송한다더라. 그렇다면 디오메데스의 암말은 무엇이고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은 또 무엇인가? 전쟁의 공포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 삶의 터전을 말끔하게 닦아주었음인가? 그대는 미노스의 황소를 붙잡음으로써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흉포한 것들을 길들인 것인가? 아마존의 허리띠를 취함으로써 백전불패의 절대권을 장악한 것인가? 게뤼오네스의 소를 몰러 먼 땅을 방황한 것은 이로써 백성들에게 넓은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하려 했던 것인가? 알지 못하겠구나. 헤리페리뎃의 사과를 취함으로써 지혜로움을 얻었고, 하데스의 지킴이 개를 사로잡음으로써 삶에서 죽음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백성들은 칭송하더라만, 나는 알지 못하겠구나.

 

<285쪽>
나는 그대가 오리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대가, 한 신이나 한 인간, 한 시대나 한곳에, 시작에서 끝까지를 통틀어 단 한 번만 오는 순간으로 올 줄을 알고 있었다. 한번만 오는 순간이라는 말을 유념하라.

 

헤라클레스가 프로메테우스를 구하러 왔을때, 프로메테우스가 한 말을 읽으며, 또 뒤에 이어지는 챕터의 문장들을 읽으며 헤라클레스가 마치 기독교의 예수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사하여주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세상에 왔다면, 헤라클레스는 스스로 고난을 헤쳐나가는 본을 보여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라는 건가? 
 

<293쪽>
헤라클레스는 돌아오는 길에 어째서 강의 요정은 네레우스에게 떠넘겼고, 네레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떠넘겼으며 프로메테우스는 어째서 또 아틀라스에게 떠넘겼는지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는 어쩌면 혼자 두 발로만 걷던 시대가 가고 있음을 얼핏 깨달았을는지도 모른다.

 
 

<357쪽>
열두 과업을 치르면서 쌓이고 싸인 노독도 풀었으니 헤라클레스는 행복했겠다. 평화로웠겠다. 아니다. 그게 그렇지 않다. 신인이나 영웅은, 죽지 않는 한 쉬지 못한다. 신들이 못 다 부린 조화의 충동은 이들에게 피와 땀이 마르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390쪽>
제우스 신을 찬양할 일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내려주었을때 그렇게 상심하시던 제우스 신께서 이제 신들로부터 인간을 지키고 저 자신의 뜻으로 고난의 육신을 벗은 헤라클레스를 저렇게 맞으시는 걸 보아라.

 

<395쪽>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알지 못하면 그의 모험을 다룬 대리석상은 돌덩어리나 다름없다. 바라건대 이 책에서 접한 이미지를 유럽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다시 만나시기를

 
정리하면서 거의 두번 읽은거나 마찬가지지만, 헤라클레스의 모험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웅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었으니 대단하다는 이야기인가?
왜 제우스가 아들을 통해 보여주려고 이룩하고자하는 인간세상의 모습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내가 결말이 궁금해서 허겁지겁 읽어버린 탓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