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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권



5권은 이아손이라는 영웅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는지 몰랐다.
5권 들어가는 말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작가가 53세에 총천연색 신화책을 쓰고 싶다는 결심을 하고 그리스 답사 과정을 읽으니, 나도 지금이라도 나만의 흑해를 건너서 금양모피를 수습하러 가야할 것 같았다. 나의 흑해와 금양모피는 무엇일까? 이아손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32쪽>
우리 개개인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흑해와 쉼플레가데스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  시작 없이, 모험 없이 손에 들어오는 ‘금양모피’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은 험악할 수 있고, 우리가 건너야 하는 강은 물살이 거칠 수도 있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바다도 늘 잔잔하지는 않다. 하지만 명심하자.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 신화적인 영웅들의 어깨에 무등을 타면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다. 내가 영웅 신화를 쓰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아르고원정대의 일원 중 한명인 의로운 사람 펠레우스(트로이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빠)덕에 트로이전쟁 무렵에 아르고호의 원정도 있었을 거라고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추정한다고 한다. 이아손 이야기는 삼천삼백년전의 영웅이야기다. 이아손은 이올코스 왕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현재 왕인 숙부 펠리아스를 찾아갔다(여기에서 1권의 모노산달로스 이야기가 한번 더 나온다).
숙부는  금양모피를 찾아오면 왕위를 돌려주겠다고 한다. 주인공 이아손은 원정대를 꾸려 아르고호를 타고 콜키스로 떠난다.
 
금양모피를 찾아오자! 이렇게 아르고선에 탄 영웅 50명, 영화 어벤저스나 만화 서유기가 생각났다. 갖은 고생과 모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앞에 다른 권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중복적으로 나와서 기억을 떠올리기 좋았는데, 두번을 읽으면서도 너무 헷갈린다. 시간 순서대로 쓴 신화책을 읽어봐야할 것 같다. 
 

<117쪽>
이아손 대장은 귀담아들으세요. 적대하는 바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라도,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프하지 마세요. 기뻐하느라고 마음 빗장까지 열었다가 슬픈 일 당하고,  슬퍼하느라고 삼가다가 기쁜 일을 만나는 수가 있는 법이오.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 그대들이 겪을 앞날도 이와 같을 것이오.

 
모험중에 만나는 예언자 피네우스가 한 말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 인생을 살면서 맞이하는 인연과 이별 대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133쪽>
후세 사람들은 헤라클레스의 모험과 이아손의 모험을 뚜렷하게 구분해서 말한다. 즉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 난사를 치르면서 인간의 영역과 신들의 영역을 무시로 넘나들었지만 이아손의 모험은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팔자를 타고 태어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인간 세계의 틀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220쪽>
이아손 이야기는 사연이 길고 곡절이 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아손은 그 금양모피를 떡갈나무에서 벗겨들고 아르고선에 올랐다’는 짤막한 말 한마디로 끝난다. 듣기에 따라서는 싱겁게도 들리고 그 뜻이 무섭게도 들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두고, 이 이야기를 짤막하게 전한 시인 오비디우스는 노래하고 있다.
“금양모피 역시 손에 넣는 수고에 비기면 하찮은 것”

 

<224쪽>이아손은 금양모피라고 하는 귀한 물건과, 그 귀한 물건을 손에 넣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던 아름다운 처녀 메데이아와 함께 고향 이올코스 항구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메데이아가 없었더라면 이아손의 아르고 원정대는 콜키스 왕과의 무서운 전쟁에 휘말렸을 터였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잔인했다.

 
 
4권 헤라클레스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결말만을 향해서 열심히 읽었다.
금양모피를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거지?
막상 이야기의 끝은 별거 없었다.
그냥 모험자체 떠남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메데이아의 역할이 놀랍다.
약초를 다뤄 시아버지를 젊어지게 만들고, 왕위를 내 놓지 않은 펠리아스를 교묘한 방법으로 죽인다.
이렇게 이아손은 왕위를 되찾는다. 이 이야기는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지 않는다.
이아손이 금양모피를 얻고 왕위를 되찾자마자, 불행은 또 다가온다. 
이아손이 다른 나라공주에게 한눈을 팔았고, 메데이아는 복수심에 불타 그들의 왕자 둘을 죽이고 도망쳐서 아테나이로 간다.
(그리고 이후에 테세우스의 계모가 되어 테세우스이야기에 다시 등장)
 

<239쪽>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인간)‘는 나그네길에 머물 때 아름답다. 이올코스에 정착한 이아손의 뒤끝은 이렇듯이 누추하다.

<240~241쪽>
우리는 사태를 이런 쪽으로 호전시킨 무수한 신인과 인간을 알고 있다. 붙박혀 사는 삶의 지경을 넘어 모험과 시련의 들을 떠돌던 자,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무수한 경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이 '떠도는 자들'은 인간이 모르던 것을 알게 하고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했다. 이들은 신들의 뜻이라는 구실에 기대거나 인간에게 유익한 문화를 얻어온다는 핑계를 의지하고 먼 땅 먼 바다로 길을 떠난다. 우리는 이들이 황금사과나 황금 가지나 황금 양털을 찾으러 먼 길을 떠난 것으로 믿는다.그래서 우리는 신인이나 인간이 이러한 귀물의 수호자를 이기고 속히 그 떠났던 땅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믿음과 희망을 앞세우고는 이러한 신인이나 인간이 존재의 불꽃과 자유에의 목마름에 쫓기는 까닭을 설명하지 못한다. ’호모 비아토르‘, 이 존재의 앞소리꾼을 먼 땅 먼 바다로 내모는 것은 불로초나 불사약이 아니라 떠도는 땅을 나고 죽을 땅으로 삼고자 하는 순수한 자유에의 목마름이다.

 
 
우리가 영웅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의 모험의 전리품과 귀환이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상관없이, 영웅의 모험 여정 그 자체가 의미있다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맺음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윤기가 알게 된 것을 우리도 알 수 있게끔 도와주는 통로였다. 왜?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니까. 세상의 수많은 상징을 잉태한 신화를 알면 세상이 보이고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간을 알면 인가이 보이고 그 속에 있는 내가 보인다. 보이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애정이 생긴다.

 
 
맺음말을 작가본인이 못쓴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이부분을 읽을때 눈물이 났다. 5권 시작에 밝힌  99년도의 작가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결연한 마음을 안지 고작 만하루가 되었을 뿐이고, 10년간 쭉 집필을 하신 결과를 이제 읽었는데, 이 이야기가 이제 끝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 “너 자신을 알라”
"영원히 살지 못하는 결국 죽게 되는 인간인 너 자신을 알라" 이거였다. 작가님의 삶에서도 당연히 적용되는 문장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