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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모비딕 (허먼 멜빌)

 

 

 

 


내가 왜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부터 언제가는 꼭 읽어야지 했던 책이였는데,

최근에 아는 지인이 이 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언급하는 바람에 

나도 갑자기 읽게 되었다.

 

모비딕은 매우 긴 책이었다.

내가 읽었던 단행본 소설 중에 제일 긴 것 같다. 

나는 책을 선택하면서 책의 분량을 따져보는 사람은 아니지만,

전자책을 다운받고 리더기의 쪽수를 보고 놀랐다.(상하권으로 나눠서 출판해도 될 분량)

 

 8월 말부터 시작해서 추석 직전까지 거의 한달이나 걸려서 읽었다.

주로 출퇴근 시간이랑 잠들기 전에 책을 보는데, 9월에 재택근무가 많아서 그랬기도 했고

새로산 리더기가 불끄고 보기만 해도 금방 잠이 오는 놀라운 수면제 기능을 해서 그런지

읽는데 오래 걸렸다. 한권의 책을 보면서도 중간에 이것저것 다른 것을 보긴 하지만,

9월엔 이 책만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고래잡이에 대한 내용이고 비극이라는 것 만 알고 읽기 시작했다.

시작 부분에 키퀘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난 이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느낌을 받았다.

소설은 어둡고 춥게 시작되지만, 뱃사람의 우정과 낭만을 다루는 소설인건가 유추 했었다.

더 읽고 나서는, 아 이건 고래 백과사전인가?

그리고 더 읽다보면, 노인과 바다 같은 장르인가? 생각도 했다가.

모비딕은 언제 만나는 건가? 지루하기도 했지만,

중간중간 에피소드들이 있고 여러번 곱씹어 읽을 만한 문장이 많아서 읽을 만 했다.

 

모비딕 독후감에 보면, 이런 평이 많았다.

'지루해도 끝까지 읽고 나면, 놀라운 감동을 받는 책'

난 그 감동이란게 무엇일까 매우 기대가 되어 결국 다 읽었는데,

마지막에 책장을 덮을 때, 나에겐 '아 끝났다. 비극이 맞았구나' 하는 감흥이 남았다. 

그리고 책에 실린 역자후기가 더 좋았다. 역자 후기가 아니라면 소설 속 상징과 은유를 하나도 못 알아 챌 뻔 했다.

역자후기를 읽고 나서야 미국 문학사에서 저자의 위치라던가 평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역자님이 모비딕 소개로 표현하신 '비극에서 느껴지는 장엄한 숭고미'를 나는 제대로 못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밑줄 그은 문장을 워드로 다시 입력하면서 새롭게 책의 내용이 정리가 되었고,

언제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좋을 책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전이란게 이런거구나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모비딕은 10년 후에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

 

밑줄 긋기

 

주인공이 여인숙에서 처음 퀴퀘그를 만나고 조금 알고 나서 느낀점을 서술하는 장면에 밑줄을 그어놨다.

아마도 이때 나는 직장에서 조금 외로웠나 보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위해 기억해 놓은 문장 같다.

 

처음에는 지나칠 만큼 위압감을 주지만, 단순함에서 나오는 그들의 차분한 침착성은 소크라테스의 지혜처럼 느껴진다. 나는 퀴퀘그가 여인숙의 다른 선원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퀴퀘그는 절대로 남에게 먼저 접근하지 않았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태도에는 무언가 숭고한 것이 있었다... (중략)..

그는 목성에라도 와 있는 듯 낯선 사람들 사이에 던져져 있었지만, 마음이 무척 편안해 보였다.

그는 완전한 평정을 유지했고, 자신을 벗 삼아 혼자 지내는 데 만족했고, 늘 자신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다.

확실히 이것은 훌륭한 철학자의 특징이었다. 퀴퀘그는 철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을 테지만,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문장에도 밑줄

 

무척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문 밖이 너무 추췄기 때문에 더욱 아늑하게 느껴졌다. 방에는 불기운이 전혀 없었으니까. 사실은 이부자리 바깥도 쌀쌀했다. '더욱 아늑하게'라는 말을 쓴 것은,몸의 따뜻함을 즐기려면 몸의 일부가 추워야 하기 때문이고, 이 세상의 모든 특성은 비교에 의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면에서 편안하다고, 오랫동안 그래왔다고 으스대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더 이상 편안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진실을 바로 보고 싶지 않은 어리석은 인간의 내면 심리묘사에도 밑줄

 

내가 나 자신에게 철저히 정직했다면, 배가 드넓은 바다로 나가자마자 배의 절대적 독재자가 될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고 그렇게 긴 항해에 이런 식으로 몸을 내맡기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무언가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거기에 벌써 깊이 말려들어가 있으면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에게도 그 의심을 은폐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려고 애썼다.

 

인간과 세상살이에 대한 여러 묘사들,

결국 나도 돈 때문에 회사에 다니는 거라는 단순한 진리를 다시 한번 인정했다.

 

선장과 항해사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억압과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오만함이 있었지만, 그보다 지위가 낮은 작살잡이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태평스러운 방심과 여유, 그리고 거의 광란이라 할 만한 자유분방함이었다.

 

에이해브는 다른 문제도 잊지 않았다. 강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인간은 모든 천박한 생각을 경멸하지만, 그런 순간은 금세 덧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신이 만든 제품인 인간의 본질적 상태는 바로 천박함이고,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설령 흰 고래가 이 야만적인 선원들의 마음을 충분히 자극하여 그들의 야만성 위에 너그러운 의협심까지 만들어 낸다 해도, .. 그들은 좀 더  평범하고 일상적인 식욕을 채워줄 음식도 먹어야 한다.... 이 뱃놈들한테서 돈벌이의 희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그렇다. 돈이다. 그들이 지금은 돈을 경멸할지 모르지만, 몇 달이 지나도 돈을 벌 가망이 없으면 잠잠하던 돈이 당장 그들 속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이해브를 해치워버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듯 말듯, 그럼에도 공감이 갔던 문장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도 복잡한 사태에는 우주 전체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난이나 농담으로 여겨지는 야릇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그 농담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농담이 다름 아닌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한다. 그래도 그는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고, 논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모든 사건, 모든 신조와 믿음과 신념,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온갖 어려운 일들이 아무리 울퉁불퉁한 혹투성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꿀꺽삼켜버리는 것과 같다. 강력한 소화 능력을 가진 타조가 총알과 부싯돌을 통째로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소한 고생과 걱정,돌발적인 재난의 예상, 목숨이나 팔다리를 잃을 위험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도 그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익살꾼에게 장난스럽게 얻어맞았거나 옆구리를 기분 좋게 쥐어박힌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그 기묘한 변덕은 사람이 극도의 시련을 겪고 있는 순간에만 찾아온다. 그 사람이 가장 진지한 순간에만 찾아오기 때문에,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가장 중대한 일처럼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통상적인 농담의 일부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자유롭고 편안한 악당 철학을 낳기에 가장 알맞은 것은 바로 고래잡이의 위험이다. 따라서 나도 그 철학을 가지고 피쿼드호의 항해 전체와 그 목표인 거대한 흰 고래를 지켜보았다.

 

 

앞으로 고래가 물을 뿜는 장면을 볼때마다 생각날 문장

 

다른 고래들과 달리 향유고래는 절대로 얕은 곳이나 해변 근처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로 미루어보더라도 향유고래는 세상에 흔해빠진 천박한 존재는 아니다. 향유고래는 육중하고 심오하다. 플라톤, 피론, 악마, 제우스, 단체처럼 육중하고 심오한 사람들이 깊은 사색에 잠겨있을 때는 항상 머리에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증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이 거대한 신비의 괴물이 잔잔한 열대의 바다를 유유히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 웅대한 신비감에 감동이 되어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하고 온화한 머리 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명상이 낳은 증기가 닫집처럼 덥여 있고, 하늘이 그의 생각을 보증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곱 빛깔 무지개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맑은 하늘에는 무지개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지개는 증기만 빛나게 할 뿐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희미한 의심의 짙은 안개를 뚫고 신성한 직관이 이따금 분출하여, 내 마음속의 그 짙은 안개를 천상의 찬란한 빛으로 태워버릴 때가 있다. 나는 이것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모든 사람이 의심을 품고 많은 사람이 부정하지만,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직관을 더불어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지상의 온갖 것에 대한 의심, 천상의 무언가에 대한 직관,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신자도 불신자도 되지 않고, 양쪽을 공평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삶은 지금 여기에, 그리고 행복은 내 주변 가까이에 있다는 문장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되풀이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경우든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어떤 식으로든 바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켤코 지성이나 상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나 연인, 침대, 식탁, 안장, 난롯가 그리고 전원 등에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 불운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보기?/ 삶은 원래 그런 것!

 

그때도 역시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전에 당한 재난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생각이 그의 편집광적인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늪에서 가장 맹독을 가진 독사도 숲속에서 감미로운 노래를 지저귀는 새들처럼 자기 종족을 번식시키듯, 불행한 사건도 모든 경사와 마찬가지로 자손을 낳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분명히 깨달은 것 같았다....
슬픔의 조상과 자손은 기쁨의 조상과 자손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전의 가르침에서 추론한 바에 따르면, 이승에서의 자연발생적인 향락은 저승에서 자손을 낳지 못하고, 지옥 같은 절망에서 나오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자포자기만 있을 뿐이다. 반대로 죄 많은 인간의 불행은 내세에서도 영속하는 슬픔의 자손을 낳아서 번성한다고 한다. 문제를 더 깊이 분석해보면, 불행과 행복 사이에는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지상 최고의 행복도 그 속에 무의미한 찌꺼기를 감추고 있지만, 반대로 모든 슬픔의 밑바닥에는 신비로운 의미가 숨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대천사 같은 장려함이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헤이해브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숭고한 인간 비극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우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들의 계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태양이 아무리 즐겁게 건초를 말리고 추수철에 둥근 보름달이 조용히 심벌즈를 울려도 신들이 항상 즐거워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이마에는 지울 수 없는 슬픈 반점이 태어날 때부터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이를 새긴 신들의 슬픔을 나타내는 흔적일 뿐이다.

 

인간은 늘 후회를 반복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인생을 의미를 알게되는 것인가?

 

하지만 뒤섞이고 뒤엉킨 삶의 실오라기는 날줄과 씨줄로 엮이고, 평온한 날씨는 반드시 폭풍과 교차한다. 우리의 삶에도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해진 단계를 거쳐 나아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즉 유년기의 무의식적인 도취, 소년 시절의 맹신, 청춘 시절의 의심, 이어서 회의, 그다음에는 불신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만약에'를 심사숙고하는 성년기의 평정 단계에서 정지하는 걳은 아니다. 일단 그 단계를 다 거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 '만약에'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닻을 올리지 않을 마지막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지친 사람도 싫층내지 않을 세계는 어떤 황홀한 창곡을 항해하고 있는가? 버려진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아이를 낳다가 순진 미혼모가 남긴 고아와도 같다.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비밀은 어머니의 무덤 속에 있으니, 그것을 알려면 무덤으로 가야 한다.

 

역자 후기에 실린 번역가 이석희님의 문장으로 모비딕을 읽어 낸 내 경험이 한층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비극도 너무 장엄하면 슬픈 게 아니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걸 미학에서는 숭고미라고 하는데, 내가 뭔가 고양되는 느낌, 그래서 내 삶이 구원받는 느낌이 드는 것, 그게 문학을 예술을 접하고 경험하는 이유가 아닐까. 모비 딕을 읽는 것도 그렇다. 그 과정은 모비 딕을 쫒아가는 그 험난한 항해만큼이나 길고 어렵지만, 그 끝에 이르러 위와 같은 장면과 마주치면 어느 순간 독자들은 자신의 영혼이 함껏 고양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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