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년대 소설 읽기에 빠져서 결국 신경숙까지 읽었다(특이점이 온다 같은 과학기술 책을 읽는 괴로움 때문, 그 반작용인듯).책을 읽는 동안 물 속에 푹 젖은 것 처럼 몸과 마음이 아주 무겁게 눌러진 기분이였다. 마지막장 덮자마자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서 중반까지 읽었다. 아! 이제 그만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읽는 것 만으로도 내 정서에 큰 타격감을 주는 소설 오랜만이라 소감을 적어본다.
나에게 이 책은 ‘그때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몰랐던, 나이 먹어가며 배워야만 깨닿는 사랑의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96년도에 이 책을 읽었다. 그때 계절과 책의 두께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당시 중학생에게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라는 단어조차 낯설었는데, 이걸 읽는 내가 참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인공 이름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은서, 완, 세. 세 사람의 삼각관계 이야기였던 것 까지 기억했는데, 이번에 읽어보니 그때 내가 정말 어렸구나! 생각했다. 물론 진짜 어렸지만, 나는 중학교시절부터 지금까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식의 가정을 자주한다. 그러나, 그때 읽었으나 여전히 그때는 몰랐다는 걸 깨닿는다.
소설 속 90년대 핸드폰이 없던 시절의 연애는 너무 느리고 답답하다. 그런데 소설의 유선전화나 공중전화, 편지나 메모따위를 휴대폰과 문자메시지로 바꾸면 그대로 나의 2000년대 연애이야기 된다. 사랑이란 것을 믿고 유일한 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을 인생의 과제로 생각했던 나의 이십대 시절을 은서를 통해 복기했다. 너무 슬프고 아팠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을까? 오랫동안 놓지 못한 질문을 여전히 꿈 속에서도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절에서 한참 멀어진 지금, 깊은 슬픔을 다시 읽으니 안심이 된다. 그때의 상실과 슬픔, 고통은 세월 속에 다 사라졌고 운이 좋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나의 노화에 감사했다.
나는 이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환상을 깼으니 나의 딸에게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얘기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나처럼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수 없겠지! 나도 이제서야 은서가 이수에게 남긴 편지가 제대로 이해되니 말이다. 완벽하게 홀로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나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에 그런 완벽한 사람은 없지. 누군가를 갈망하는 시간과 고통에서 상처받고 그걸 극복하면서 스스로를 단단히 할 수 있겠지. 마음이 착찹해지지만, 딸이 모든 우연을 다 거치고 나처럼 결국 중년을 잘 맞이하기를 바라며, 겨우 책에서 빠져나왔다.
<에필로그에서 은서의 편지 일부>
나, 인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냈구나. 한 가지 것에 마음 붙이고 그 속으로 깊게 들어가 살고 싶었지. 그것에 의해 보호를 받고 싶었지. 내 마음이 가는 저이와 내가 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살고 싶었어. 늘 그러지 못해서 무서웠다. 그 무서움을 디디며 그래도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였지. 하지만 이제 알겠어. 그건 내가 인생에 너무 욕심을 낸 거였어.
…..
그래, 일이 잘못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단다. 그 생각만 인생을 생각하게 했어. 그 생각만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줄 것 같았어. 그 사람이 저이인가 하면 그이는 이미 내 편이 아니더구나. 왜 안 그러겠니. 세상에는 나 같은 여자들이 수도 없고, 한때나마 나를 사랑한 건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지, 내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야. 서로 사랑했을 때조차도 그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이를 사랑했을 텐데 왜 안 그러겠니.
…..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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