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독서모임을 두개 했는데, 그 중 벽돌책 읽는 모임에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었다.
책의 두께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 택배 박스 열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들기조차 버겁다. 독서대를 최대한 눕히고 겨우겨우 얹어서 읽었다.
벽돌책 읽기 독서모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간 매일 읽고 정리 및 인증을 하는 방식이고
주말 2일 동안엔 질문에 대한 답변해보기 과정이였고, 자율적(소정의 참가비 있음) 참여로 이루어진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지만, 진도 맞추느라 열심히 읽었다.
혼자서 읽었으면 절대로 다 읽지 못 했을 것 같다.
독서모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것은 마치 대학때 교양과목 한개 이수하는 듯한 에너지 소모였다.
나에게 주는 일일 학습지 개념같은 압박을 견디며,
완독자에게 주는 소정의 상품 커피쿠폰 꼭 받고 말겠어! 다짐하면서
출근 전에 읽고 퇴근 후에 정리했더니 5월이 다 가고 없었다.
내가 자꾸만 책상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였더니 남편과 아이들이 당황스러워하며 책에 애증을 보이기도 했다.
먼 과거에서 지금까지 인간사회에서 폭력이 줄어왔는가?
이 책에서는 폭력감소 과정을 많은 역사적 사실과 데이터를 동원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우리의 본성에 있는 천사를 제시한다.
정말로 과거보다 폭력이 감소했나?
맞다! 그렇다! 통계적으로 숫자가 정말 그렇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상상할 수 있고 내가 겪을 현재의 폭력에만 이입되어
여전히 세계가 폭력적이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는 아덤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얘기한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큰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보다
내 손에 작은 상처 하나 가 더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인간의 이기심과
아! 옛날이 좋았지!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뱉는 근대성에 대한 회의,
과거에 대한 망상적인 향수가
내 안에도 있음을 마주했다.
어쨌든 인간들은 우리 내면에 있는 4가지의 선한 천사(감정이입, 자기 통제, 도덕감각, 이성)의 도움으로
폭력을 줄여왔다고 한다. 책의 10장만 읽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10장이 전체 내용의 요약이라
10장과 역자후기만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책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내가 얼마나 스케줄에 맞춰 읽기 위해
집중했는지가 더 중요했던 책읽기 였지만
폭력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며 지금이 정말 좋은 시대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현대를 살고 있는 것이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정리를 했지만, 많은 양의 챕터별 밑줄 긋기를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나 이거 왜 하고 있지? 의문이 불쑥불쑥 든다
이 책이 약 1200쪽쯤, 그리고 삼체를 2권까지 읽었으니 그것도 1000쪽쯤, 그 외 자잘하게 읽어댄 5월의 책들
여기에 나의 시간과 정신 에너지를 받치느라 내가 놓친 것, 소홀히 한 것은 없는가?
하루 24시간 중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서 읽어대는 이 행위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명확한 답을 알 수 없어서 6월에 또 도전하기로 했다.
1장 낯선 나라
<p. 29>
우리는 과거의 삶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과거의 일상에 잔학성이 얼마나 깊숙이 구석구석 엮여 있었는지를 곧잘 잊는다. 문화의 기억은 과거를 평화롭게 미화하여, 피투성이였던 원래 모습이 탈색되어 창백해진 기념품만을 우리에게 남긴다.
<p.47>
구약의 역사 기록은 픽션이지만, 기원전 500년경 근동 문명의 삶과 가치를 보여 주는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이스라엘인이 실제로 집단 살해를 자행했든 아니든, 그들이 그것을 좋은 생각으로 여긴 것만은 확실하다…(중략)
당시에는 관습과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에 비하면 사람의 목숨 따위는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중략)
성경에 대한 공경은 순전히 부적 같은 의미이다. 근래 수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히브리 성경을 달리 해석하거나, 우화로 간주하거나, 덜 폭력적인 다른 텍스트로 교체했다(유대인은 탈무드로, 기독교인은 신약 성서로). 혹은 그저 무시했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폭력에 대한 대중의 감수성이 워낙 크게 변했기 때문에, 요즘은 신앙인들조차도 성경에 대한 태도를 구획화하게 된 것이다. 신자들은 말로는 성경을 도덕률의 상징으로 인정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더 현대적인 다른 원칙들로부터 도덕률을 얻는다.
<p.67>
사실 명예란 참 이상한 것이다. 명예는 모두가 남들이 그 존재를 믿는다고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위신을 추구하는 충동이나 규범에 대한 집착과 같은 인간 본성의 몇몇 부분이 그 거품을 부풀리지만, 유머 감각과 같은 인간 본성의 다른 부분은 그 거품을 뻥 터뜨린다..
공식적인 결투제도는.... 사라졌다.
역사학자들은 법적 금지나 도덕적 반대보다는 조롱의 말이 제도의 쇠락에 더 기여했다고 본다.
<p.79>
… 우리에게는 오늘의 위험들이 있지만 어제의 위험들은 훨씬 더 나빴다. 여려 분은 다음과 같은 위험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 노예로 납치되는 것, 신의 명령에 따른 집단 살해, 죽음을 부르는 원형 극장과 마상 시합, 대중적이지 않은 신념을 품었다고 해서 십자가.. 처벌받는 것, 아들을 못 낳는다고 해서 목이 잘리는 것,…그리고 문명과 인류를 아예 몰살시킬 만한 핵전쟁의 전망.
1장 낯선 나라를 흥미롭게 읽었다. 1장은 매우 쉽고 읽히고 친절하게 사례를 제시하면서 현대사회는 인간사이에서 폭력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해 준다. 책에서 설명한 결투의 장면들이나 명예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복수의 대물림을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어이없다. 어릴 적 재밌게 봤다고 착각하는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지금 다시 책으로 보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고 죽이는 연쇄적 복수 장면이 등장하는데, 폭력성이나 시대적 배경은 둘째치고 그 당사자들의 지능 수준이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결투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역사가들의 해석이 마음에 든다. “신사가 엄숙하게 결투장으로 나서서 기껏 젊은 세대의 비웃음을 사는 형편이니, 아무리 전통으로 굳은 관습이라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의심이 든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위기 상황을 매일 미디어로 보기 때문이다. 폭력성과 현대 대량살상무기가 만나서 일으키는 피해가 과거시대보다 줄어든 게 사실일까? 물론 지금까지 추세로는 위에 언급한 일들을 내가 당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미래에도 정말 그럴까? 인류 공멸의 핵전쟁 시나리오는 나만의 무서운 상상인가?
2장 평화화 과정
<p.86>
홉스는 리바이던의 주목할 만한 한 대목에서 불과 100100 단어로 폭력의 동기를 분석했는데, 현대의 어떤 분석에도 뒤지지 않는 통찰이다.
싸움에는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경쟁, 둘째는 불신, 셋째는 영광이다.
<p.89>
홉스의 분석은 무정부 상태의 삶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
리바이던은 개인들의 의지를 구현하는 동시에 폭력의 사용을 독점하는 군주 혹은 정부를 말한다. 리바이어던은 공격자를 처벌함으로써 개인들의 공격 동기를 제거한다.
<p.92>
나는 리바이어던이 다스리는 사회들과 무정부 사회들에서 전체 인구 중 폭력에 의한 사망자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능한 수치로 헤아려 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명화된 삶의 장단점을 살펴보겠다.
<p.126>
최초의 리바이어던은 폭력의 문제를 하나 풀었으나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냈던 셈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살인과 전쟁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줄었지만, 대신 독재자, 성직자, 도둑 정치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화화라는 단어에 숨은 음흉한 뜻을 깨우친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를 가져오기만 하는 과정이 아니었다. 강압적인 정부가 절대적인 통제를 가하는 과정이었다.
2장은 홉스의 라바이어던 맛보기 편 같다. 자연상태(무정부)의 인간이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 놓이게 되고 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통한 군주국가의 발전, 그러나 군주(리바이어던)의 탄생은 독재로 이어지게 된다! 는 것까지 쉽게 이해되었다.
3장 문명화 과정
<p.132>
이번 장에서는 중세에서 현재까지 유럽의 살인율 감소를 알아보고,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도 이와 대등한 사례나 반대되는 사례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겠다. 장 제목은 엘리아스에게 빌려 왔다.... .. 엘리아스만이 유일하게 이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p.137>
유럽은 도시와, 세계주의, 상업화, 산업화, 세속화를 겪을수록 점점 더 안전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현상을 유효하게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 즉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견해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중세 유럽의 일상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그런 결론을 내렸다.
<p.143>
중세인은 한마디로 역겨웠다.
<p.153>
리바이어던이 통제권을 쥐자,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이제 개인이 부를 쌓는 방법은 일대에서 제일 악독한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궁정에서 왕과 측근들에게 호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귀족은 마케팅 방식을 바꿔야 했다. 왕의 수하들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예절을 닦아야 했고, 그들의 심중을 이해하려면 감정 이입 능력을 길러야 했다.
….
엘리아스는… 그리고 국가의 중앙 집권화와 대중의 심리 변화를 연결 짓는 자신의 이론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사에서 신하로”
<p.154>
중세 후기에 벌어진 두 번째 외생적 변화는 경제 혁명이었다.
<p.156>
포지티브섬 게임은 폭력의 동기도 바꾼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호의나 잉여를 교환한다면, 그가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편이 당신에게도 더 좋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상해 볼 동기가 주어진다.
<p.157>
문명화 과정의 두 유발 기제는 -리바이어던과 온화환 상업-이어져 있다. 상업의 포지티브섬 협동은 리바이어던이 다스리는 널따란 공간 속에서 융성한다.
<p.163>
문명화 과정 이론은 현대의 폭력 감소를 상당 부분 설명하는 듯하다. 이 이론은 유럽의 놀라운 살인율 감소를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유럽의 10만 명당 1명이라는 복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시대와 장소가 어디 일지를 정확하게 예측했다.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례들 중 두 가지는….…. 사회 경제적 하층 계급이 다른 하나는 지리적으로 접근과 거주가 어려운 지역이다. 한편, 나머지 두 사례는 문명화 과정이 역전된 영역인데, 하나는 개발 도상국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이다.
<p.170>
한마디로, 역사적 문명화 과정은 폭력을 없앤 것이 아니라 폭력을 사회 경제적 변두리로 추방했다.
<p.174>
안정된 민주 국가는 안정된 독재 국가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 안전하지만, 신흥 민주 국가와 준민주 국가는 폭력 범죄에 시달리거나 내전에 취약할 때가 많고 두 폭력이 섞이기도 한다.
<p. 206>
사회학자 카스 바우터르 스는 유럽의 문명화 과정이 끝까지 전개된 뒤 그 후속으로 탈형식화 과정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문명화 과정은 과정은 상류 계층에서 아래로 규범과 예절이 흘러내린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어 더 이상 상류층이 도덕적 모범으로 보이지 않았고, 취향과 예절의 위계가 점차 평평해졌다.
<p.207>
공격의 주 표적은 문명화된 행동을 내면에서 지배하는 자, 즉 자기 통제였다. 이제 자발성, 자기표현, 금지에 대한 방향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p.225>
.. 범죄? 많은 사회 과학자가 시도했으나, 그들이 얻은 최선의 결론은 원인이 다중적이었다는 것뿐이다… 너무나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두 가지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는 리바이어던이 더 강해졌고, 똑똑해졌고, 효율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둘째는 1960년대에 반문화가 전복하려고 애썼던 예의 문명화 과정이 제 방향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문명화 과정은 아예 새 국면에 접어들었던 것 같다.
<p.237>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자발성과 개인성의 징후를 모조리 찍어 눌러야만 스스로를 문명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미 비폭력의 규범이 공고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구식이 되어 버린 일부 금지들은 오히려 어겨도 괜찮다….
사회가 이미 철저히 문명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해도 남들이 괴롭히거나 공격할 걱정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신호이다.
3장 문명화 과정을 읽고 나서 폭력의 감소와 증가에 다양한 원인이 복잡하게 연관 지어짐을 이해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엔 범죄율이 더 높을 것이다!라는 보편적인 생각이 잘못된 인과관계의 사례이고 퇴폐적인 대중문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폭력이 줄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3장의 제목이기도 한 책 ‘문명화 과정’을 쓴 사상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3장을 읽는 중에 펼쳐든 다른 책 “마음 챙김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느닷없이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소개가 한 줄 나오는데 얼마나 반가웠던지!!
4장 인도주의 혁명
<p.252>
정치학자 제임스 페인은 폭력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이런 의견을 냈다. 고대에는 고통과 죽음이 너무나 흔했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타인의 생명에 낮은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신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는 풍습이라면, 설령 그 대각가 타인의 목숨을 바치는 것일지라도, 그런 행위에 대한 문턱이 낮아졌다.
<p. 253>
왜인지는 몰라도 결국 사람들은 인간 제물을 포기했다. 한 가지 설명은 엘리트의 문해 능력, 역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이웃 사회와의 접촉이 결함함으로써 사람들이 피에 굶주린 신이라는 가설은 틀렸다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254>
인간 희생양을 무차별적으로 갈구하는 살벌한 신. 이것은 불행에 대한 이론치고는 조잡하다.... ..
불행을 겪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초자연적인 힘의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힘을 휘두르는 것은 보편적인 신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이었다. 그런 개인의 이름이 마녀였다.
<p.265>
새로운 존중은 일면 정서적 변화였다.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에 동일시하는 습관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나 또 어떤 면에서는 지적, 도덕적 변화였다. 영혼에 가치를 두는 태도가 생명에 가치를 두는 태도로 바뀐 것이었다.
<p. 315>
독서는 관점 취하기의 기술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셈이다.
<p. 319>
소설이라는 장르, 특히 서간체 소설이 감정 이입 확산에 결정적이었든 아니든, 독서의 폭발적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습관을 갖게 만듦으로써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독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 가치아 사회 질서에 대한 새로운 발상들이 자랄 온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p.337>
인도주의 혁명은 역사적 폭력 감소 과정에서 하나의 이정표였고 인류의 자랑스러운 업적이었다. 미신적 살해, 잔인한 처벌, 변덕스러운 처형, 소유 노예제는 지구에서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을지언정 변두리로 밀려났다. …
계몽주의적 인도주의 철학은 일단 서구 세계에 발을 붙인 뒤, 좀 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들이 비극적으로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4장은 18세기부터 급격하게 줄어든 폭력들(마녀사냥, 고문, 노예제도)의 원인을
인도주의와, 계몽주의에서 찾아보는 장이다.
앞부분은 잔인했지만, 팩트 위주로 읽기 수월했다.
뒷부분은 읽기 버거웠다.
저자는 인도주의와 계몽주의가 폭력의 감소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서술하면서도 그에 대한 반론을 세세히 제시하면서 설명한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읽는데 매우 숨 가쁘다.
특히 계몽시대 철학의 계보 부분이 많이 어려웠다. 반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연결 흐름에서도 막막했다.
5장 긴 평화
<p.357>
인구, 가용성 편향, 역사적 근시안을 조정할 경우, 20세기가 역사상 가장 유혈적인 세기였다는 주장은 전혀 확실하지 않은 말이 되어 버린다.
<p.381~382>
전쟁들은 멱함수 분포를 따르므로, 이 분포의 수학적 특징을 알면 전쟁의 속성과 발생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우선, 전쟁 그래프와 같은 지수 값을 지닌 멱함수 분포에서는 고정된 평균이 없다. ‘전형적인 전쟁’이란 없다는 말이다. 즉,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어떤 수준까지 사망자가 쌓인 뒤 이후에는 자연적으로 잦아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p.383>
세계가 사망자 1억 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사망자 10억 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그보다 더 낮다. 하지만 핵무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겁에 질린 상상력과 멱함수의 수학이 동의하는바, 그 가능성이 천문학적으로 낮지는 않다.
<p.394>
리처드슨은 전쟁 통계에 대해서 두 가지 광범위한 결론에 도달했다.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라는 것과 전쟁의 규모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는 것이다.
<p.433>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명예 대결이었다. 먼저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자들이 세르비아에게 대공 암살을 사과하고 국내 민족주의 운동을 자신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소탕하라는 모욕적인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친구 슬라브 사람들을 대신하여 역정을 냈고, 독일은 친구 독일어 사용자들을 대신하여 러시아의 역정에 역정을 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까지 가담하여, 체면과 모욕과 수치와 평판과 신용의 대결은 통제 불능으로 경화했다. 그들은 ‘이류 국가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약한 치킨 게임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p.434>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의 예언이 실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 그 매력은 언제까지나 간직될 것이다. 그것이 천박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인기가 사라질 것이다.”
<p.437>
이제 종말의 날은 ‘생태계의 피해, 법람, 파괴적 폭풍, 가뭄의 증가, 북극의 해빙’등을 뜻한다. 이것은 일종의 진보가 아니겠는가.
<p.458>
20세기 가치들의 풍경에서 또 다른 역사적 격변은, 민주 국가의 대중이 지도자의 전쟁 계획에 저항한 것이었다.
<p.479>
화학 무기 터부와 핵무기 터부의 유사성은 확연하다. 핵무기가 비교할 수 없이 더 파괴적인데도, 오늘날 두 가지는 ’대량 살상 무기‘로 뭉뚱그려 불린다. 두 터부가 서로 상대를 연상시키면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아파하며 천천히 죽어 간다는 점, 전장과 민간의 경계가 없다는 점도 두무기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한다.
<p.503>
인간은 또한 도덕적 동물이다. … 인간의 행동은 감정, 규범, 터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적 직관에 따른다는 뜻이다. 이런 자질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자동으로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순간에 지도자들과 그 연합체들의 도덕적, 인지적 자질이 평화로운 공존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마침 알맞게 조합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감상적인 생각도 비과학적인 생각도 아니다. 어쩌면 긴 평화는 그런 상태일지도 모른다.
<p.504>
무엇이 선진국들로 하여금 전쟁을 인도주의적으로 피하도록 만들었을까? … 20세기 후반.. 텔레비전, 컴퓨터, 위성, 원격통신, 제트기 여행, 과학과 고등 교육의 유례없는 확장이다… 지구촌.. 하나의 촌락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느낀다.
6장 새로운 평화
<p.513>
데이비드 흄이 관찰했듯이, “현재를 비난하고 과거를 찬미하는 경향은 인간 본성에 깊숙이 뿌리내린 것이라, 심오한 판단력과 광범위한 학식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늘날 저널리스트들과 지식인들의 문화가 수학을 잘 모르는 탓이 아주 크다.
<p.527>
오늘날 가난과 전쟁의 연관 관계는 매끄러운 선을 그리기는 해도 대단히 비선형적이다.
<p.576>
대중이 집단 살해의 공포를 새삼스레 깨우친 데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준 것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초크와 요나손은 이런 회고가 역사적으로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 새로운 인도주의적 감수성 덕분에 집단 살해는 인류에 대한 범죄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그 범죄를 고발하는 증인이 되었다.
<p.577>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는 통치자들만이 뉴스를 생산했지만, 20세기에 처음으로 피통치자들이 뉴스를 만들었다.”
<p.590>
테러는 특이한 폭력이다. 공포와 피해의 비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살인, 전장, 집단 살해의 사망자에 비교하면, 전 세계 테러의 희생자는 고작 통계적 잡음 범위에 불과하다.
<p.591>
테러 사망자는 워낙 적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는 경미한 조치가 오히려 위함을 높일 수 있다. … 911 공격 이듬해에 비행기 납치.. 염려하여 차를 몰고 가기로 결정한 사람들 중 1500명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 테러가 일으키는 공황과 테러가 일으키는 죽음의 불균형은 우연이 아니다.
<p.592>
테러리즘은… 공포 심리를 지렛대로 씀으로써,, 실제 인명이나 재물에 대한 피해보다 훨씬 큰 감정적 손상을 입힌다… 우리는 새롭고, 감지할 수 없고, 효과가 지연되고, 현대과학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위험을 더 많이 걱정한다… 우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걱정한다. 통제할 수 없고, 파국적이고 불수의적이고, 불공평한 상황을 염려한다.
<p.596>
테러를 새 천 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부실한 것이다.
<p.611~613>
애트런은.. 자살 테러리스트들을 면담하여, 그들에 대한 세간의 흔한 오해를 반박했다. 그들은 무지하고, 가난하고, 허무주의적이고, 정신에 문제가 있기는커녕 오히려 교육을 잘 받았고, 중산층이고, 도덕심이 있고, 뚜렷한 정신 이상 소견이 없었다. 애트런은 그들의 동기가 혈연 이타주의에서 나올 때가 많다고 결론지었다.
팔레스타인 자살 테러리스트의 99퍼센트가 남성이고, 86퍼센트가 미혼이며, 81퍼센트는 팔레스타인의 평균 가족 규모보다 많은 여섯 명 이상의 형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테러리스트가 제 몸을 날려서 얻는 금전적 보수는 그의 형제들이 신부를 얻기에 충분한 정도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의 희생은 번식 면에서 가치가 있다.
이런 직접적 유인책이 없어도 자살 테러리스트를 모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청년들을 순교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효과적인 미끼는 행복한 형제들의 무리에 합류할 기회이다… 종종 직업이 없는 젊은 미혼 남성들의 동아리로 시작한다… 모인 청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무리에 헌신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테러리스트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코란이나 종교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친구들의 눈앞에서 명예와 존경을 보장하는 짜릿한 대의와 행동의 유혹입니다. 살아서는 결코 누리지 못할 더 큰 세상의 존중과 기억을 친구들을 통해서 영원히 즐기는 것입니다.
<p.625>
이슬람은 어쩌다 선두를 놓쳤을까? 어째서 이성의 시대, 계몽 시대, 인도주의 혁명을 갖지 못했을까?
.. 루이스는 .. 역사적으로 모스크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았던 점을 지목했다.... ..
오스만 제국은 기계식 시계, 표준 도량형, 실험 과학, 근대 철학, 시와 픽션의 번역, 자본주의 금융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점은 인쇄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래된 종교의 지배력이 이슬람 문명의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이 흘러드는 것을 막아, 상대적으로 편협한 발달 단계에 고착시켰을지도 모른다.
6장의 제목 새로운 평화란 냉전 종식 후 20년 넘게 전쟁, 집단 살해, 테러가 감소한 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6장을 읽으면서 자살폭탄테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금 수정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하게 청년들이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한 혈연(유전자 계승자)을 위한 이타주의였다니!
7장 권리혁명
<p.708>
연구 결과는 다양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제 자식을 자발적으로 죽이는 행위가 인간이 실시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임을 암시했다.
<p.710>
영아 살해는 마음의 무정함이 아니라 삶의 가혹함에서 비롯한다.
<p.716>
아무리 성차별적인 사회라도 여자 없는 세상을 원하지는 않았다… 설령 자기 딸을 죽이는 집안이라도 주변에 여자가 있기를 바란다. 그저 남들이 그녀들을 길러 주기를 바랄 뿐이다. 여아 살해는 일종의 사회적 기생이고, 무임승차자 문제이고, 유전적인 공유지의 비극이다.
<p.717>
남아 선호는 재산권이 왜곡된 시장에서만 발생한다. 부모가 아들을 소유하되 딸은 사실상 소유하지 못하는 시장이다.
<p.737>
우리가 그동안 보았듯이, 인도주의적 개혁의 시기에는 한 집단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비유를 통해서 다른 집단의 권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왕의 전제성을 남편의 전제성에 빗댄 것이 그랬고, 그로부터 200년 뒤에 시민권 운동이 여성권 운동을 자극했던 것도 그랬다. 학대 아동의 보호도 비유의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 대상은 동물이었다.
<p.738>
영국에서도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첫 소송을 맡은 것은 왕립 동물 학대 금지 협회였고, 그로부터 전국 아동 학대 금지 협회가 생겨났다.
<p.751>
그리고 입양아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입양아의 성격과 지능 지수는 혈연관계가 없는 양부모의 자녀들과는 상관관계가 없고, 생물학적 형제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성인기의 성격과 지능이 유전자와 우연에 의해 형성되지만, 부모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적어도 부모가 모든 자식에게 행하는 행동과는 관계없다는 말이다.
<p.785~786>
(동물권에 대해서) 진정한 전환점은 철학자 피터 싱어가 1975년에 발표한 ”동물 해방“이었다. 이 책은 동물권 운동의 성서라고 불린다… 싱어는..…싱어는.. 우리가 동물에게 굳이 ‘권리’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동물의 이해를 온전히 고려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 우리가 어떤 존재를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간주할지 말지 결정할 때 그 기준은 지능이 아니라 의식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그는 “확장하는 원- 사회 생물학과 윤리”에서 도덕 진보의 이론을 제안했다. 자연선택은 인간에게 자신의 친족과 동맹을 중심에 놓는 감정 이입 능력을 부여했는데, 차츰 그 대상의 폭이 넓어져서 가족에서 마을, 친족, 부족, 국가, 종, 이윽고 감각 있는 모든 생명들까지 포함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p.802>
.. 그러나 다른 종들의 자연스러운 육식성이 존중할 요소라면,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육식성은 왜 아닌가? 더구나 우리가 인지적, 도덕적 능력을 활용하여 먹히는 동물들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말이다.
<p.806~807>
내게 권리 혁명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생적 원인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사상과 사람의 이동성을 높인 기술들에게 돈을 걸겠다. 권리 혁명의 시대는 또한 전자 혁명의 시대였다... . 고등교육에서, 그리고 과학 연구의 최전선엥서 유례없는 성장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 시기에 출판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p.809>
어쩌면 기술 발전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도덕 발전에도 해당될지 모른다. 더없이 올바른 예언자가 고립 상태에서 작성한 도덕률보다는 방대한 정보 유역에 위치한 개인과 문명이 수집한 도덕적 노하우가 그 지속성과 확장성 면에서 더 뛰어날 수 있다.
8장 내면의 악마들
<p.820>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공격성을 익힐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잘못된 질문이었다. 옳은 질문은 아이들이 어떻게 공격성을 버릴까 하는 것이다.
<p.826>
.. 다윈주의적, 아주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한다. 그 자제력을 우리 인간은 불안이나 마비로 경험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신중함이다. 연민과는 무관하다.
<p.832>
자기 위주 편향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치르는 진화의 대가이다. …… 우리에게 사회적, 도덕적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가 공감을, 감사화 신뢰를, 외로움과 죄책감을,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 이런 감정들이 내면의 규제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생활의 대가로 고통받지 않으면서도…. 사회생활의…. 이득을 누릴 수 있다… 사회 집단은 다양한 수준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지닌 협력자들의 시장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들통나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실제보다 높게 선전한다.
<p.833>
우리는 남을 더 잘 속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속인다…
.. 자기기만은 희한한 이론이다. 자아가 기만하는 동시에 기만당하는 역설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자기 위주 편향은 쉽게 보여 줄 수 있다.... .. 그러나 사람들의 자기기만을 보여 주기는 좀 더 어렵다. 가기기만은 암거래상이 작성하는 이중장부와 비슷하다.
<p.846>
생물학적 폭력 연구에서 가장 오래된 발견 중 하나는 통증이나 좌절과 공격성의 연관 관계를 밝힌 것이었다. 우리가 동물에게 충격을 가하면, 혹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 동물은 가까이에 있는 다른 동물을 공격한다.
<p.864>
포식적 폭력은 너무나 평범하고 쉽게 설명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도덕적 풍경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짓을 하지?” 이때 우리는 지루함, 욕정, 놀이 등등 명백한 답이 있는데도 그 답을 거부하는 셈인데, 왜냐하면 가해자의 이득보다 피해자의 고통이 비교가 불가능할 정보로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해자의 관점을 취하고, 순수한 악의 개념을 취한다. 그러나 사실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가 아니라 왜 그런 일이 더 자주 벌어지지 않는가를 물어야만 그런 무도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p.865>
사이코패스는 서로 신뢰하는 협력자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소수의 인간들이 그 협력자들을 착취하고자 진화시킨 전략일지도 모른다.
<p.874>
만일 개인이 여러 집단에 속해 있고 그 집단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모욕과 멸시를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존중하는 다른 집단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장류 종에서는 두 동물이 싸운 뒤 화해를 한다. … 그렇게 화해할 것이라면 애초에 왜 싸울까?..,? .., 화해는 장기적으로 서로 이해가 얽힌 개체들 사이에서만 벌어진다.
<p.880>
폭력에 대한 이런저런 착각 중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널리 퍼진 착각은, 낮은 자존감이 폭력을 낳는다는 가설이다…
폭력은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지나친 자존감이 문제이다. 특히 근거 없는 자존감의 문제이다.
<p.894>
우세 경쟁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적응 현상이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사회나 협정과 규범으로 규제되는 국제 체제에서는 우세 경쟁의 기능이 없다.
…
여성이 직업 세계에 진출한 것도 한몫했다. 여자들은 우세 경쟁을 철부지 남자들의 소란으로 간주하고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기 때문에, 여성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세의 아우라가 빛이 바랜다.
<p.926>
… 지금까지 살펴본 화해의 심리를 적용하자면, 적어도 그 해결책의 모습에(이-팔 관계) 대해서는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의 전망이 옳은 듯하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p.930>
가학성이 발달하려면 두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동기, 그리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그 동기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막는 제약의 제거이다.
<p.941>
가학성이 후천적 취향이라는 사실은 두려우면서도 희망을 준다. 우리 뇌에 갖춰진 동기 체계가 그것을 낳는 경로라는 점에서, 가학성은 상존하는 위험이다. 개인이든 보안 조직이든 하위문화이든, 첫 단계를 밟았다가 자칫 더 타락한 단계로 은밀하게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획득해야만 하는 취향이므로, 우리가 첫 단계를 차단하고 나머지 경로를 환한 햇살 아래 드러낸다면 가학성으로 가는 길을 원천 봉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p.943>
이데올로기적 폭력의 진정한 수수께끼는 심리 문제가 아니라 역학 문제이다. 어떻게 유해한 이데올로기가 소수의 나르시시스트 광신자들에서 인구 전체로 퍼질까?
<p.947>
집단에게 다른 집단에 대한 권위가 부여된 환경에서는 다른 상황이라면 결코 야만성을 드러내지 않을 사람들도 야만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순응과 복종을 도덕 화하기까지 한다. 순응과 복종을 바람직한 가치로 격상시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도덕 감각 중 하나이고, 많은 문화에서 증폭된 현상이다.
9장 선한 천사들
- 감정 이입
<p. 986>
감정 이입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상대방이 감정 이입이 되는 대상일수록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
<p.992>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의 고통을 지켜보는 자신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돕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공감할 때는, 자신의 괴로움을 덜 수 있든 없든 상대의 고통을 덜겠다는 동기가 더 지배적이었다.
<p.995>
공감을 일으키는 외생적 기제로 가장 강력한 것은 아주 값싸고 널리 적용되며,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픽션, 회고록, 자서전, 르포를 읽으면서 타인의 관점을 취해 보는 것이다.
<p.1002~1003>
.. 감정…
감정 이입과 공정성의 상충은 실험실에서만 관찰되는 희한한 현상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 : 정부관료가 친척이나 친구에 거 특권 나눠주기 등)
감정 이입의 또 다른 문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두루 고려하는 힘이 되기에는 너무 편협하다는 점이다… 감정 이입은 귀여움, 잘생긴 외모, 혈연, 우정, 유사성, 공통의 유대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타인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감정 이입의 범위를 넓힐 수는 있지만, … 그 정도는 크지 않은 편이고 효과가 일시적일 수도 있다.
- 자기 통제
<p.1005>
폭력도 대체로 자기 통제의 문제다.
<p.1017-1028>
흔히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은 꼬장꼬장하고, 억압되어 있고, 신경질적이고, 속으로 삭이고, 긴장되어 있고, 강박적이고,… 통설이 있지만, 연구 결과는 그 반대였다. 자기 통제가 강한 사람일수록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자기 통제 척도에서 상위를 차지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제일 건강했다.
<p.1037>
문명화 과정 이론은, 감정 이입의 범위 확장 이론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분야와는 거리가 먼 다른 분야의 실험과 데이터로부터도 지지를 얻은 셈이다. 심리학, 신경 과학, 경제학은 엘리아스의 추론을 입증했다. 인간에게는 자기 통제의 능력이 있고, 그 능력은 폭력적 충동과 비폭력적 충동을 둘 다 조절하며, 개인의 일생에서 더 강화되거나 더 넓게 일반화될 수 있고,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수준이 달라질 수 있다.
<p.1054>
문화적, 사회적 자극이 우리 내면의 선한 천사들(자기 통제, 감정 이입)의 설정을 조절함으로써 폭력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우리는 최근의 생물학적 진화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폭력 감소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 도덕성과 터부
<p.1059>
도덕규범은 사람들이 그 원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때조차 폭력에 효과적인 제동 장치로 기능한다.(.. 기르던.(.. 개가 차에 치여 죽었을 때 시체를 먹어도 되는가?라고 물었을 때 사람들은 안된다고 대답했지만, 이유를 설명 못함)
<p.1066>
도덕화된 규범은 하나의 관계 맺기 모형, 하나 이상의 사회적 역할(부모, 자식, 교사, 학생, 남편, 아내, 감독, 고용인, 고객, 이웃, 낯선 사람), 하나의 환경(집, 거리, 학교, 일터) 하나의 자원(식량, 돈, 땅, 주거지, 시간, 조언, 섹스, 노동)을 담고 있는 하나의 구획이다. 자신이 속한 문화에서 사회적으로 유능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이런 규범들을 많이 흡수하고 있다는 뜻이다.
<p.1073>
양극단 사이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진보-보수 스펙트럼이 있다. …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전쟁, 즉 세금, 의료 보험, 복지, 동성애자 결혼,,, 등을 둘러싼 충돌은 국가의 정당한 도덕적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서로 다르게 보는 데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하이트가 지적했듯이, 양극단의 이론가들은 서로 상대를 도덕관념이 없는 사람들로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의 뇌에서는 도덕의 회로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단지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품고 있을 뿐이다.
- 이성
<p.1133>
이성은 어떻게 이런 요구들을 만족시킬까? 그것은 이성이 무제한적인 조합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새로운 발상을 무수히 생성할 수 있는 엔진이다. 우리가 일단 기초적인 자기 이익 추구 능력과 타인과의 소통 능력을 갖추면, 다음에는 이성 고유의 논리가 이성을 더욱 추진한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이성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이해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과거의 추론에서 결함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현재에 맞게 개선하는 것도 늘 이성의 몫이다. 여러분이 지금 내 논증에서 흠을 발견한다면, 그 흠을 지목하고 대안적 견해를 구축하게 만드는 것도 이성의 일이다.
9장의 선한 천사들에서는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이 세 가지 선한 천사들을 도와주는 것은 ‘이성’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성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이성이 결국 지능이라는 얘기 인가? 싶은 사례만 머리에 남았다.
지능과 폭력 범죄, 지능과 협동 등 똑똑한 사람일수록 폭력을 덜 저지르고 똑똑한 사회일수록 협동이 잘된다는 이야기에 설득이 되면서도 묘한 반감이 들었다. 결론 문장에 따르면 앞으로 인간은 이성으로 해결 못할 폭력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말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마지막에 도덕감정론 발췌문을 읽으면서, 아담 스미스급의 도덕적 자아성찰형 인간으로 인류가 진화하는 희망찬 미래를 꿈꿔보게 된다.
10장 천사의 날개를 타고
<p.1142~1143> 무기와 군비축소
.. 역사적으로 무기의 파괴력과 치명적 싸움의 인명 피해사이에서 상관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 핵? 핵무기가 세계사의 경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말은 앞에서 했다. 핵무기는 전투에서 쓸모가 없는 데다가 기존 무기들도 충분히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핵무기 개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쓸 것이라는(괴상하지만)(괴상하지만) 흔한 주장은 완전히 틀린 말로 드러났다.
핵무기에 대한 이 책의 주장을 읽을수록,,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는 것의 속셈은 안보불안을 조성이겠군 싶어 진다.. 또한 핵 보유에 성공한 북한이 핵이 위협성에도 불구하고 상상초월의 유치하고 원시적인 오물 풍선이나 띄워 보내는 현실이 참으로 웃프다.
자원과 힘
<p.1144>
자원 경쟁은 역사의 핵심적 역학이었지만, 폭력의 거시적 경향성에 관해서는 별다른 통찰을 주지 못핬다.. 지난 50년 동안 가장 파괴적인었던 분쟁들은 자원이 아니라 종교, 혁명, 민족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불붙었다.
평화주의자의 딜레마의 비극적 요소 두 가지
<p.1151~1152>
1. 세상이
2. 피해자의
‘강간범이 자신의 충동을 해소하는 그 찰나의 쾌락은 그가 피해자에게 일으키는 고통에 비하면 엄청나게 사소하다. 이런 비대칭은 엔트로피 법칙의 궁극적 결과이다. 우주의 모든 상태들 중 생명과 행복을 지지하는 형태로 정렬된 상태는 극소수이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를 장려하고 만들어 내는 일보다는 행복한 상태를 파괴하여 비참함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언제나 더 쉽다.’
온화한 상업
<p.1157>
온화한 상업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둘 다 평화주의자가 되는 선택지에 교환을 통한 상호 이득의 당의정을 입힘으로써 평화주의자의 딜레마를 푼다.
<p.1158>
(국가적 영광추구에서 이윤추구로) 이런) 변화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도덕적 파산 선고를 내리고 그 속박에서 풀려난 탓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한 경제가 제공하는 톡톡한 보상에 유혹된 탓일 것이다.
<p.1159~1160>
내가 이 장에서 소개한 다른 평화의 힘들과는 달리, 온화한 상업 이면의 사고방식은 아직 심리학 실험으로 직접 확인되지 않았다… 어쩌면 온화한 상업 이론이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인 발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지적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사업가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편이라, 평화처럼 고귀한 것의 공이 상인들에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미처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p.1170>
감정 이입이 현실에서 정책과 규범을 바꾸어 폭력을 줄이려면 이성이라는 보편화 촉진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p.1171>
비록 이성의 에스컬레이터는 자주 속도가 떨어지고, 방향이 바뀌고 저항을 겪지만, 더 폭넓은 효과도 발휘한다. 그것은 부족주의, 권위주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도덕 체계로부터 멀어져 인도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자율성, 인권을 강조하는 도덕 체계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근대성에 대한 고찰
<p.1172~1175>
오늘날의 사회 비평에서는 근대성에 대한 혐오가 중심적이고 고정적인 요소이다. … 그들은 말한다. 기술이 우리에게 소외, 파괴, 사회의 병리, 의미의 상실, … 지구를 파괴하는 소비문화 외에 무엇을 주었단 말인가?
감상적이지 않은 역사 기록과 통계 해석이 근대성에 대한 시각을 바꿔 놓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것들은 평화로웠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망상 중의 망상임을 보여준다.
물론 근대성의 힘들이(이성, 과학, 인도주의, 개인의 권리) 언제나 한 방향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고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마찰과 상처를 없애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성은 분명 우리의 건강, 경험, 지식을 향상했다..
<p.1178>
평화주의자의 딜레마라는 이 화나는 구조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추상적 속성이다. 이 딜레마에 대한 가장 종합적인 해결책, 즉 관점의 교환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서구 문화를 비롯하여 여러 도덕적 전통들이 거듭 발견했던 황금률을 뒷받침하는 원칙이다.
이 책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평화주의자의 딜레마’ 개념이다.
인간 종이 그 딜레마를 안고 태어나서 개인마다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착취하거나 착취당하거나 배신하거나 배신당하거나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현실.
나만 도덕적인 인간으로 살다가는 호구가 될게 뻔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진 공감과 자기 통제, 관점의 전환으로 인류가 “다 함께 번영할 세속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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