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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중학교 2학년때 도덕시간의 일화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마 통일에 대한 수업날이였을 것이다.
수업 초반에 도덕선생님이 "통일을 해야된다고 하는 사람 손들어봐요." 하셨고
아마 절반쯤만 손을 들었던것 같다. 나는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선생님은 그날 수업을 하시고 끝마칠때쯤 다시 질문을 하셨다.
"이제 통일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요."
대부분의 반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그날 수업 도중에 선생님이 지나가듯 얘기하셨을텐데
나는 그때 그 단어가 머리에 각인되었다. 빨갱이 빨치산 단어의 어원에 대한 설명이였다.
러시아어로 파르티잔인데, 그게 빨치산으로 쓰이게 됐다는 얘기였다.
선생님이 하시는 여러 말씀중 수업과 크게 관계 없는 여담들이 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이후로 저 단어는 소설 태백산맥을 읽을 때에 무섭게(?) 아프게 다가왔다.
또 625전후가 배경인 박완서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면 또 한번 덜컥 무섭고
우울하며 슬프게 불현듯 소환되어지는 붉은 느낌의 단어였다.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여기저기에서 소개되었을 때
다시 한번 중학교 도덕시간의 그 마음과 이후 책들을 읽을 때의 감정이 소환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아무리 책이 재밌다고 해도) 우울함에 휩싸일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너무 웃겨서 나는 전자책을 사서 봤지만 굳이 남편 보라고 종이책도 사게 됐다.
아직 남편이 읽지 않았지만(또 달의 궁전을 읽고 있음) 조만간 읽히고 말리라!

이 책은 구빨치산이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일장을 치루면서 그 사이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비극적인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님 필력 너무 대단하다.
"가장 개인적인 것은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이지의 말의 실제 예시가 바로 정지아 작가님의 이 소설 같았다.
무겁게 볼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삼아 이렇게나 재밌게 쓰시다니!

이 책을 두번 읽었다. 한번은 빠르게 후다닥 읽었다.
사투리가 너무 생생해서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너무 재밌게 읽었다.

두번째는 등장인물 하나하나 다시 되새기면서 천천히 읽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인물이 여럿 나와서 앞장 다시 넘어갔다가 오기도)
슬픈고 아픈 역사가 버무려진 가족사인데 또 너무너무 웃겼다.(이걸 그냥 웃겼다고만 표현하는 내가 싫다)

여튼 너무 빵터지게 웃겨서 내가 밑줄 그은 내용들을 정리하려고 하니
책 줄거리가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아 정리하기가 망설여진다.
전자책으로 읽으면서 어떤 단어마다 하이라이트를 해놓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보면
내가 왜 여기에 표시를 했지? 또 내가 뭔가 줄 많이 친것 같은데 하이라이트가 몇개 없네? 이런 경우가 있는데
이 책도 그랬다. 그래서 또 세번째 읽고 있다.

처음에 빵터진 부분은 펄벅 자살 뉴스부분이였다.
버스에서 읽다가 웃음 터져버렸다.
그리고 이런 대화체들과 상황이 만담처럼 웃겼다.

"누구긴 누구겄냐! 늬 어매 첫서방이제"

"워찌나 청산유순가 셋바닥에 신이 내렸는 중 알았당게. 말문 터질라먼 예수 믿어야 쓰겄대"

그럴 때의 아버지는 평소처럼 무표정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약간 신이 난 듯도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진정한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가타부타 말 할 수 있는 사람도 싸우지 않는다. 똑똑한 아버지가 그건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분이 머리끝까지 차 싸움에 임하는 사람을 절대 이기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총을 들고백운산과 지리산을 누빈 역전의 용사라는 게 나는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개판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 였다. ........................................................................................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 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또 올라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은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 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너무 재밌다. 웃긴다고 후기를 쓰지만
또 너무 슬프고 아프다.
장면장면 여러번 울컥했다. , 상상도 못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게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슬프고 아팠다.(이걸 그냥 슬프다고만 표현하는 내가 싫다.)
아홉살 작은아버지 얘기도 슬프고, 형 누나가 죽은 뒤 하염없이 사는 친구도 슬프고
비전향장기수, 그 시절 어렵게 살았던 민중(?)이야기,
지금도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 모두 골고루 슬프고 아팠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 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직도 나는 박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질 께 뻔한 전쟁이었소"
질 께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 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렸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깐,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웃기고 슬프고
결과적으로 인간애와 위로, 따뜻함이 남았다.
일찍 돌아가신 내 아빠의 장례식 장면
내 13살 초반의 무감각한면이 깨어났다.

종이책 뒷표지에 나오는 두분의 추천사를 읽으며
정리 안되는 감정을 겨우 추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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