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책 몰아서 읽기 챌린지로 넥서스와 호모데우스에 이어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제언까지 읽었다. 세가지 책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초반엔 좀 지루하게 읽었다. 그러나 앞의 모든 책이 그랬듯이 작가의 스토리텔링 솜씨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이 책은 각장의 키워드가 앞과 뒤로 엮어나가는 전개방식이라 다 읽고 나서 목차를 보면서 감탄하기도 했다(독서모임에서 같이 읽은 분들은 유발 하라리 책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으로 사피엔스를 꼽았다. 예전에 읽었던 사피엔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 책은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21세기 기술의 발전은 소수의 빅데이터 소유자와 소외된 인간으로 집단을 구별할 것이고 우리가 믿었던 자유와 평등의 개념도 재정의 될 것이다(제1부 기술적 도전). 기술적 도전의 상황에서는 각 국가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민의 문제는 문화적 경제적 갈등상황에서 진퇴양난이다. 민족주의를 넘어서 전지구가 하나의 문명이라는 인식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린다(제2부 정치적 도전). 테러리즘과 전쟁의 공포도 무시할 수 없지만, 거기에 압도되면 안 된다.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 할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제3부 절망과 희망). 전지구적 문제를 대응할 지구적 공동체 설립은 불가능해 보인다. 허무함을 이겨내기 위해 종교적 도그마에 빠지거나 자본주의 지낙상원으로 도피하고 싶다. 그럴 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믿는 이야기를 의심해보고 진실을 찾는 노력을 지속 할 때다(제4부 진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명백해 보인다. 기술의 발전으로 변화는 가속화 될 것이고 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인생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내가 믿는 이야기에 매몰되어 희생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관찰을 시작해야 한다(제5부 회복탄력성).
환멸에서 시작된 책의 여정이 세상을 한바퀴 돌아 나의 정신으로 되돌아 온 기분이다. 마지막 주제가 명상이기 때문에 앞에 다른 저작들과 다르게 책이 더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느껴졌다. 역자 후기에도 언급되는데, 나도 마지막 5부의 <20.의미>와 <21.명상>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다. 호모 데우스를 읽으며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의 허무함과 자유의지 없음에 대해서 많은 충격을 받았다면 이번 책에서는 나름대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발 하라리가 세속주의 유대인이자 소수자로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살까? 했던 의문도 조금 풀린 것 같았다(하루 2시간은 명상, 나머지 22시간은 평범하게 산다고).
<436쪽>
비록 이런 큰 이야기들 모두가 우리 자신의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라 해도 좌절할 이유는 없다. 실체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 가공의 드라마에서는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맡고 싶어 하는가?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이다. 모든 허구적 이야기를 포기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실체를 관찰할 수 있다. 자신과 세계에 관한 진실을 안다면 아무것도 당신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473쪽>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491쪽>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괴로움은 고통과 전혀 다릅니다. 고통은 어떤 경험입니다. 주로 압력이나 열, 긴장 같은 다양한 감각들로 구성됩니다. 반면, 괴로움은 고통에 의해 촉발 될 수도 있는 정신적 반작용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많은 경험들로도 촉발 될 수 있습니다.
<491쪽>
막대한 괴로움은 고통보다는 즐거운 느낌에서 나옵니다.
<492쪽>
괴로움의 본질은 실체의 거부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고통이든 쾌락이든)을 경험하면서 그 밖의 것을 바랍니다. 고통을 경험할 때에는 그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쾌락을 경험할 때는 쾌락이 강해지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실체의 부정이 모든 괴로움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고통에서 달아나고 더 많은 쾌락을 쫒아 달려가는 대신, 보다 균형 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치 달라이 라마나 법륜스님이 하시는 말씀 같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고통과 괴로움을 나의 주관적 경험으로 풀어보면 이랬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시점에 나는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교 신자로서, '같은 제품이라면 더 싼것을 사라!'라는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시내면세점을 돌고 인터넷면세점을 둘러보고 현지가격 조사도 빠짐 없이 하고 있었다. 이미 결제한 후에 가격비교(요즘은 이게 정말 너무 다양해서 매우 어렵다)를 통해 취소 후 재결제도 두번쯤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을 읽으며, 물건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허무함(쉽게 말해 현타)이 동시에 몰려와서 괴로웠다. 아! 이것이 고통인가? 하라리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괴로움에 해당된다. '물건을 많이 사는게 더 좋다'는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시간과 돈을 희생하여 괴로움을 촉발시키고 있는거구나! 그리하여 물건을 거의 다 취소했다(일부는 소유했음에 여전히 괴롭다). 여행 중에도 물건소유(쾌락)욕으로 달려가고 싶은 내 정신을 점검했더니, 우울했다. 괴로운 마음에 물건 소비로 도피하고 싶었다.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정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날, 한국의 폭설로 내가 타야 할 비행기의 현지 도착이 지연되었다. 계속 되는 지연문자에 불안함이 몰려왔다. 오랜 시간의 대기 끝에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또 출발은 지연되었다. 좌석에서의 대기가 길어졌다. 답답하고 불안함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생각했다( 최근에 읽어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음으로). 이것은 고통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괴로움(이 상황은 나의 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도 실체 같았다. 내가 실체라고 느낀 것들은 이륙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고통과 괴로움에서 달아나고 싶은 그 순간, 균형잡힌 정신을 유지하는 법으로 자기 관찰과 명상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 시간이였다.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쉽게 그 결심을 잊는다. 그러므로 기억하기 위해 남겨놓는다. 앞으로 세상이 천지개벽을 할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려면 균형 잡힌 정신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명상을 하겠다고까진 아니더라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실체를, 가변성을 바라봐야겠다고.
'인생은 이야기이다'라는 믿음을 포기해도 삶은 지속될 수 있다는 말은 아직 믿기 어렵다. 인생의 의미부여 신화를 놓지 못하고 책을 읽은 후 나의 고통과 괴로움을 해석해 보는데 더 큰 시간을 할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이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괴로움에 비하면 너무 사소해서 이걸 나의 한계라고 적는것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책 한권을 읽어도 내 감상과 내 느낌이 중요해서 어떻게든 내 경험을 담아보려는 내 믿음의 실체도 계속 의심해봐야겠다.
한편, 이 책을 통해 기쁘고 반갑게 얻은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내가 책을 읽고 정리하는 시간의 의미를 확실하게 찾은 기분이다.
<492~493쪽>
종이 묶음이라는 책의 물리적 형태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종이책을 읽기보다 오디오북을 듣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책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 그러니깐 140자 트윗이나 유튜브의 1분짜리 재미있는 고양이 동영상 같은 것들을 스치듯 훑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한 주제를 깊이 탐구하는 데 여러 시간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잠시 뜸했던 우리집 취침 전 20분 독서시간도 부활했다. 40대 부부,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아들과 초6이 되는 딸, 네식구가 거실에 모여 20분 알람을 맞춘 채 책 읽기를 연속 2주간 했다. 여행과 설 연휴로 잠시 멈췄으나,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온 식구가 협조적이라 감동적이다. 세상엔 독서보다 재밌는 일이 훨씬 많지만, 책의 경험을 유지하고 몰입하는 방법 만큼은 아이들이 꼭 습득했으면 좋겠다. 저번달 친정엄마라 휴양지로 해외여행을 갔었다. 엄마가 비치베드에 누우신 채로 오디오북으로 토지를 듣고 계시는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열대의 파란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일제시대 이야기로 빠져드는 능력, 이것을 내가 그대로 물려받았구나! 그 순간을 통해 엄마 닮은 나를 긍정하고 나를 닮을 아이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이야기는 현실을 왜곡 할 수 있어 위험하지만, 내가 언제 어느 장소에 있든 그 속으로 몰입 해 들어갈 수 있는 능력 그 자체를 나는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이 유발 하라리 책이 맞나 싶게 불교적 시선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후기를 적었다. 매일 1시간 쯤 읽고, 10분간 정리했던 나만의 몰입시간의 기록이 내 인생의 의미찾기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독서를 통해 나의 집착의 실체를 깨닿고 그에 따른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며 밑줄긋기 모음을 정리해본다.
제1부 기술적 도전
1.환멸
<24쪽>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가 신기술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 1990년대 이래 인터넷은 다른 어떤 변수보다 더 크게 세상을 바꿔놓았지만, 인터넷 혁명의 방향을 이끄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기술자들이다.
<29쪽>
이제 대중은 자신이 사회와 무관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에게 남은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 필사적이다.
<32쪽>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순간과 히틀러의 순간, 체 게바라의 순간에 이어 이제 우리는 트럼프의 순간에 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 자유주의 이야기가 마주한 상대는 제국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처럼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적수가 아니다. 트럼프의 순간은 훨씬 더 허무주의적이다.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 공산주의혁명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역사의 순간을 묘사하는 이런 서술방식이 유발하라리 책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또 돌아왔으니 이 허무함을 어쩔것인가.
<39쪽>
하지만 자유주의는 우리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 생태학적 붕괴와 기술적 파괴라는 문제 말이다.
<41쪽>
현재 인류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어떤 합의를 이루기란 요원해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환멸과 분노의 허무주의적 순간 속에 있다…. 만약 거리로 달려 나가 “종말의 날이 왔다!”라고 외치고 싶다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사실은 내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지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인간세상 될대로 되라지! 앞으로 이런 허무주의가 더 만연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런생각도 오만일 수 있다고 하니, 진정하고 겸허하게 이해해보도록 해야겠다.
2.일_네가 어른이 되었을 땐 일이 없을지도 몰라
<46쪽>
지난 수십 년 신경과학과 행동경제학 같은 분야에서 이룩한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인간을 해킹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음식부터 배우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어떤 신비로운 자유 의지가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에 확률을 계산하는 수십억 개의 뉴런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인간의 직관’이라고 과시해온 것이 사실은 ‘패턴 인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53쪽>
모든 형식의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이 빅데이터 분석에 가장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입력과 산출을 정확히 수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력은 음파의 수학적 패턴이고 산출은 신경(에서 일어나는)폭풍의 전기화학적 패턴이다.
<78쪽>
보편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79쪽>
만약 보편적인 경제 안전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알고리즘에 일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실제로는 축복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것은 훨씬 무서운 시나리오다. 대량 실업의 위험과는 별도로, 우리가 훨씬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인간의 권위가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기술발전으로 대량 해고가 발생될 직업군의 사람들을재교육할 시간의 확보, AI 발전 속도를 적당하게 지연시키기, 실업자에게 기본급을 주는 정책의 개발, 인간의 욕심을 적절히 조절하도록 사회공동체 구축. 2050년까지시간은 없는데, 우리가 준비해야할 제도와 체계는 너무나 많다. 이걸 다 준비했다고 해도 AI가 최상위존재가 되는 일은 언젠가 올 것 같다.
3.자유_빅데이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104쪽>
이 말은 도요타나 테슬라가 자율 주행 차량을 설계할 때 도덕철학의 이론적인 문제를 현실적인 공학의 문제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106쪽>
그때가 되면 철학자에게는 새로운 출구가 생길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시장 가치가 크지 않았던 철학자의 기량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미래에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싶다면 철학에 운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자율주행 기술의 트롤리 문제를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공학적 머리가 없다면 철학을 공부시켜야되나? 생각하던 참이였다.
<107쪽>
테슬라가 생산하는 자율주행 차량은 두 가지 모델이 될 것이다. 바로, 테슬라 박애주의자와 테슬라 에고이스트다.
📝자율주행차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트롤리 문제 때문에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기 어려울거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책을 읽으며 자율주행차가 더 안전하다는 사실에 설득되었다.
<113쪽>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안 지구에서 겪는 일이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지구 전역에서 결국 경험할 상황의 예고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
<121쪽>
그런 결과를 피하려면 인공지능 개선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만큼, 인간 의식을 증진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4.평등_데이터를 가진 자가 미래를 차지한다.
<126쪽>
2100년까지 최상위 부유층 1퍼센트는 세계 부의 대부분을 자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의 미와 창의력, 건강까지 대부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129쪽>
데이터를 손에 넣기 위한 경주는 이미 시작됐다… 무료 정보와 서비스, 오락물을 제공해 우리의 주의를 끈 다음 그것을 광고주들에게 되판다. … 이들의 진짜 사업은 결코 광고를 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아 우리에 관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다.
<130쪽>
알고리즘이 우리를 위해서 뭔가를 고르고 구매하기 시작하면 전통적인 광고 산업은 파산할 것이다.
<134쪽>
데이터 소유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일 수 있다.
📝거대기업이 우리의 정보를 수집하여 보유하고 그걸로 개인맞춤 사업을 함으로서 그 거대기업만 부자가 되고 불평등이 가속화될 것이란 예측, 데이터보호와 관리의 문제 어렵다.
제2부 정치적 도전
5.공동체_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142쪽>
자기 몸과 감각, 물리적 환경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방향감각을 읽기 쉽다. 논평가들은 흔히 그런 소외의 느낌을 종교적이거나 민족적 유대감이 퇴조한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아마도 자기 몸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것이 더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146쪽>
인류를 통합하기 위한 결정적인 걸음은 인간에게 몸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것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간극으로 인간소외가 이뤄지지 않도록!
<146쪽>
기술 거인들이 인간의 몸을 접수하는 법을 배우면, 결국에는 지금 우리의 눈과 손가락과 신용카드를 맘대로 조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전신을 조작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가서 우리는 온라인이 오프라인과 분리된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 이런 날이 오기전까지 몸을 잘 데리고 살아야…겠다. 이번 책이 호모데우스+넥서스 합친 것 같아서 좀 지루해진다.
6. 문명_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165쪽>
그러니 2020년 도쿄 올림픽을 관전할 때는 이 대회가 표면적으로는 국가들 간의 경쟁이지만 사실은 놀랍도록 합치된 지구촌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대표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국기가 게양될 때에도 우선은 국민적 자부심이 솟구치겠지만, 인류가 그런 행사를 조직할 수 있다는 사실에 훨씬 더 큰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법하다.
<170쪽>
미래에 우리에게 닥칠 변화가 무엇이든 그것은 이질적인 문명들간의 충돌보다는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을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7.민족주의_지구 차원의 문제에는 지구 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
<186쪽>
민족주의적 고립은 십중팔구 핵전쟁보다 기후변화의 맥락에서 훨씬 더 위험하다. 전면적인 핵전쟁은 모든 국가를 무차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일에서는 모든 국가가 동등한 지분을 갖는다. 반면에 지구온나화가 초래할 충격은 국가마다 다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나라는, 특히 러시아는 실제로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188쪽>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 합쳐지면서, 디지털 독재부터 지구 차원의 무용 계급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세계 종말에 이르는 다채로운 시나리오의 문이 열렸다. 이런 위협에 민족주의가 제시할 수 있는 답은 무엇인가? 민족주의가 제시할 수 있는 답은 없다.
<194쪽>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고 번영하고 싶다면, 인류는 그런 지역적 충성심을 지구 공동체에 대한 실질적인 의무감으로 보완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은 자기 가족과 이웃, 직업과 국가에 동시에 충성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195쪽>
‘세계 정부’를 수립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의심스럽고 비현실적인 비전이다. 그보다는 한 나라나 심지어 도시 단위의 정치가 작동하는 과정에서도 전 지구 차원의 문제와 이익에 좀 더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뜻이다.
📝지구의 문제를 민족주의로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 당장 눈앞에 닥친 기후변화에 대한 지구차원의 해법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위의 문장을 일으니 어릴때 환경보호표어의 문구들이 생각난다. “물을 아껴쓰자” “우리의 자연은 후손에게 잠시 빌려쓴 것이다” 등등 결국 지구단위의 정치적 해법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나부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니, 이를 어쩐다.
8. 종교_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210쪽>
종교가 아무리 고리타분해 보여도 약간의 상상력과 재해석을 거치면 최신의 기술 도구와 가장 정교한 근대 제도와도 거의 언제든지 결합할 수 있다.
<212쪽>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 인류는 지금 단일 문명을 이뤄 살고 있으며, 핵전쟁과 생태 붕귀, 기술적 파괴의 문제는 지구촌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런 지구 차원의 문제와 지역 정체성의 충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현재 위기에 처한 세계 최대 다문화 실험의 장, 유럽연합이다. 유럽연합은 보편 자유주의 가치의 약속 위에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통합과 이민 문제의 어려움 때문에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9.이민_더 나은 문화를 찾아서
<229쪽>
..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들로’ 가득하다.
<235쪽>
우리는 이민을 둘러싼 유럽의 논쟁이 명확한 선악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민 논쟁은 어떤 협상 불가능한 도덕적 명령에 관한 비타협적 투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두가지 정당한 정치적 입장 사이의 토론일 뿐이며, 표준적인 민주 절차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유럽의 난민문제를 생각할때, 먼나라 얘기로 방관했다. 수용국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시절 유럽이 뿌린 업보가 아니겠는가? 하는 냉담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민난민에 대해서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하고 문화에 동화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난민이라면, 내가 수용국의 국민이라면,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조차 하기 싫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 다양한 문화간의 갈등 문제를 표준적인 민주 절차로 해결하려면 엄청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 시간이 너무 지난하니깐 우리 모두 그냥 사이좋게 잘 지내자~하면 어떨까! 이런 어이없이 순진한 생각도 해본다.
제3부 절망과 희망
10. 테러_당황하지 말라.
<244쪽>
우리는 직관적으로 테러가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건을 물질적 충격보다 감정적 충격으로 판단한다.
<248쪽>
테러의 극장이 그토록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국가는 정치 폭력이 사라진 거대한 공간은 만들었는데 이제 그것은 공명판이 되어 아무리 작은 무장의 충격도 거대한 소리로 증폭시킨다. … 역설적이게도 근대 국가는 정치 폭력을 막는 데 성공한 결과 스스로 테러에는 더 취약해지고 말았다.
<249쪽>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테러를 상대해야 할까? 성공적인 대테러 투쟁은 세 가지 전선에서 전개해야 한다. 첫째, 정보는 테러망을 겨냥한 비밀 행동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둘째, 미디어는 사건을 다룰때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과잉 반응을 피해야 한다.
<250쪽>
세 번째 전선은 우리 개개인의 상상력이다… 따라서 테러의 궁극적인 성패는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가 테러범들에게 상상력을 납치당하고 우리 자신의 두려움에 과잉 대응하면 테러리즘은 성공한다. 반대로 우리가 테러범들고부터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균형 있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테러리즘은 실패하게 돼 있다.
11.전쟁_인간의 어리석음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268쪽>
하지만 안타깝게도 21세기 전쟁이 아무리 실속 없는 사업이라 해도 그런 사실이 평화를 절대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개인 차원에서나 집단 차원에서나 인간은 자멸을 부르는 행동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테러와 전쟁의 공포가 미디어로 빠르게 전달되는 세상.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순진하게 낙관하는 것도 다 지양해야겠다.
📝2022년 다시 시작된 러시아 우크라이나전쟁이 하라리의 표현대로 ‘새로운 전쟁 시대의 조짐이라기 보다 예외적인 사례’로만 추가되기를…
12.겸손_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277쪽>
인류의 이야기에서 유대교의 역할은 근대 서양 역사에서 프로이트의 어머니가 한 역할과 조금 비슷하다.
<286쪽>
유대교가 유일신 사상에 공헌했다는 생각의 진짜 문제는, 그것이 좀처럼 자랑스러워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유일신 사상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최악의 사상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293~294쪽>
개인적으로 나는 잔혹한 세계 정복자들보다, 남의 일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사상을 좋아한다. 많은 종교들은 겸손의 가치를 받든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상상한다. 개인의 온숨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모든 종교가 겸손을 보다 진지하게 여기면 좋을 것이다.
📝민족적 자아도취의 실상의 예시로 자기민족 유대인의 사례를 소개한다. 유대인중에 부자나 노벨상 수상자가 많다보니 유대인에겐 뭔가 특별한 점이 있어보였다. 하라리의 설명을 듣고보니 내가 너무 좋은 편견(유대인이 똑똑하다)만 가지고 있었군 싶었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 없는 유일신교는 위험한 것 같다.
13. 신_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300쪽>
신이 우리에게 어진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도, 종교적 믿음이 도덕적 행동의 필수 조건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도덕성에 관한 한 비자연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어떤 종류의 도덕이든 자연적이다.
<301쪽>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어떤 신화나 이야기를 믿을 필요는 없다.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된다.
<302쪽>
한가지 분명한 답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따라서 자신의 행복도 남들과의 관계에 아주 많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가족과 친구, 공동체 구성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304쪽>
어떤 사원도 찾아가지 않고, 어떤 신도 믿지 않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지난 몇 세기가 입증했듯이,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굳이 신의 이름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종교생활을 하면 인생에 큰 의지가 된다는 말에 반색할 때가 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이 있을리가 없는데(?) 이 문턱을 못 넘은 무신론자로 살고 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은 자연도덕만으로도 잘 살수 있다는 글에 위로받고 의지가 되었다.
14.세속주의_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307쪽~312쪽>
세속주의의 이상이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의 가치는 진실이다. …
세속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연민이다. ..
세속주의의 쌍둥이 가치인 진실과 연민에 헌신하는 태도는 또한 평등을 향한 헌신으로 귀결된다… 끝으로 세속주의자는 책임을 소중하게 여긴다. 세속주의자는 어떤 상위의 힘이 있어서 세상을 돌보고, 사악한 자를 벌하며, 의로운 자에게 보상하고, 우리를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에서 보호해준다고는 믿지 않는다. 따라서 피와 살로 된 우리 인간이 우리가 행하는 -그리고 하지 않는-모든 것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321쪽>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겸손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작고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길 희망한다. 최저임금을 몇 달러라도 올리고 아동 사망률을 몇 퍼센트라도 낮추려는 식이다.
제4부 진실
15. 무지_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327쪽>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은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
<330쪽>
세계를 지배하면서 진실을 알아내기란 극도로 어렵다. 한마디로 너무 바쁘다. 정계의 수장들과 재계의 거물들은 쉴 새 없이 달린다. 하지만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면 결코 진실도 찾을 수 없다.
📝유권자는 권력자에게 시간낭비의 특권을 주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권력자는 진실을 알기가 더 어려울 수밖에 없겠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진실과는 더 멀어지고, 그럴때 우리가 할수 있는 일이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것이 최선이라니…, 역시 진실은 허무하게 뼈를 때린다.
16.정의_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335쪽>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시리아 내전, 세계 불평등, 지구온난화-도 예전문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문제는 규모다.
<336쪽>
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유대의 연결망에 의존해야 하고, 전 지구 차원의 인과관계까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조차 답하기 어렵다.
<337쪽>
세상이 짜인 방식이라는 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무지 속에 남아 있을 수 있고, 정작 알려고 애쓰는 사람은 진실을 알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돼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극도로 복잡해졌다는 사실이다.
<338쪽>
근데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339쪽>
사실을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의도와 무관하게 잘못된 일에 연루될 수 있다.
<344쪽>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적, 이념적 도그마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왜냐면 현실이 복잡함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사회, 국가와 민족이 제각각 자신의 특정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다.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전지구적 공동체의 설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의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삶을 더 고귀하다고 생각하고 살지만, 가끔 아무것도 모른채 살고 싶다.
17. 탈진실_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351쪽>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355쪽>
어떤 가짜 뉴스는 700년밖에 못 간다.
📝유대인 공동체가 기독교도 소년들을 죽인다는 13세기의 가짜뉴스가 20세기에 비로소 가짜 뉴스로 밝혀짐. 수천년이나 700년이나 인간의 기대수명과 비교할때 엄청난 시간이다. 내 인생에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해봐야할 이유다.
<362~363쪽>
인간에게는 이처럼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도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365쪽>
따라서 가짜 뉴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허구와 실체를 구분하기 이해 훨씬 더 열심히 분투해야만 한다. 완벽을 기대할 수는 없다.
<365~366쪽>
우리가 편견을 드러내고 정보원을 검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무다. ….
우리가 선호하는 정보원을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웹사이트든, 티브이 방송이든, 어떤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 첫째,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이 돈을 지불해야 한다. …. 두 번째 요령은, 만약 어떤 이슈가 특별히 중요해 보인다면 그것에 관련된 과학 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진실 뭔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될대로 돼라지 살고싶다가도, 인간이라면 그럴수 없지! 마음을 다잡게 된다. 양비론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서 최선을 기대하기 보단 차선 또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또 유발하라리가 제시한 정보원을 검증하는 방식도 다시 한번 기억해야겠다.
18. 공상과학 소설_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369쪽>
우리가 물건을 더 많이 사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것도, 우리 눈으로 텔레비전에서 자본주의의 낙원을 봤기 때문이다.
<385쪽>
우리의 뇌와 ‘자아’가 매트릭스의 부분인 이상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은 한번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아를 규정하는 협소한 틀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에 필요한 생존 기술이 될 수도 있다.
📝 소설 멋진신세계를 읽어봐야겠다.
제5부 회복탄력성
19.교육
<390쪽>
따라서 오늘날 아이들이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2050년이면 별 소용이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391쪽>
이런 세상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할 교육 내용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바로 ‘더 많은 정보’다. 정보는 이미 학생들에게 차고 넘친다.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식별하는 능력이며, 무엇보다 수많은 정보 조각들을 조합해서 세상에 관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다.
<393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며, 낯선 상황에서 정신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2050년의 세계에 발맞춰 살아가려면 새로운 생각과 상품을 발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재발명해야만 할 것이다.
<399쪽>
..15세 소년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이것이다. “어른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라.” 대부분은 나름 선의를 갖고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어른들 자신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어른 말을 따르는 편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세상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세계는 천천히 변했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를 것이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어른들의 말이 시간을 초월한 지혜인지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한지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만14살 내 아들을 대할 때 내가 되새겨 할 문장 같았다.
<402쪽>
사실인즉, 우리는 지금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403쪽>
.. 그들보다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빠르게 달리려면 짐이 많아서는 곤란하다. 갖고 있던 모든 환상들은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그 환상들은 너무나 무겁다.
📝평생을 안정 추구형으로 무사안일을 바라고 살아왔는데, 이런 환상을 이젠 버려야겠다. 인간을 해킹하는 시대에서 여전히 나로 살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자아가 생화학조합에 불과할지라도 더 끝까지 알고 싶다.
20.의미_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416쪽>
민족주의는 영웅담들로 우리의 넋을 잃게 하고, 과거의 재난을 되새겨 감동으로 눈물짓게 하는가 하면, 민족이 겪은 불의를 반추해 우리의 분노에 불을 붙인다. 우리는 이런 민족의 서사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 민족에 미치는 영향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 전에 먼저 우리 민족이 왜 중요한지 물어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 역사를 매우 감정적으로 배웠고, 국뽕에 매우 취약한 사람으로서 왜 대한민국이 중요한지 자문해보았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감성적인 민족주의자인건 알겠다.
<426쪽>
우리에게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는 모두가 허구적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야기를 실제처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이야기를 믿고 싶어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실제로 믿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사제들과 무당들은 답을 찾았다. 그것은 바로 의식이다. 의식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허구적인 것을 실제로 만드는 마술적인 행동이다.
📝기독교의 빵과 포도주 나눠먹는 의식, 부활절 달걀, 왕실의 의전, 종교예식, 유교문화의 제사 등등 모두 의식을 통해 허구를 강화한 예시
<429쪽>
인생의 궁극적인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 거대한 장애물이다. 하지만 공자와 같이 사회의 안정과 조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은 골칫거리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의례와 의식이야말로 최선의 동맹이다.
<430쪽>
사람들이 화려한 깃발을 흔들고 국가를 부를 때 추상적인 이야기는 실체가 있는 현실로 바뀐다.
<432쪽>
특정한 믿음을 위한 희생이 크면 클수록 신앙은 더 강해진다. 이것이 신비한 희생의 연금술이다.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 돈값 만큼 훌륭한 차가 아니라면, 그 돈 주고 물건을 산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질 것이므로. 연인에게 비싼 선물을 요구하는 이유, 나에게 그만큼의 희생을 보여줌으로서 사랑을 증명하라는 소리
<438쪽>
희생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뿐 아니라 믿음에 요구되는 다른 모든 책무를 대체할 때가 많다. 인류가 믿어온 대부분의 거대한 이야기가 설정한 이상은 대다수 사람은 완수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도저히 이상에 맞춰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결책으로 희생에 의지한다.
<439쪽>
고대와 꼭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인간의 의미 추구는 희생의 연속으로 끝날 때가 너무나 많다.
📝내가 믿는 이야기 때문에 희생하고 사는 건 무엇일까?모성신화나 집밥의 힘을 믿고 좋은 엄마 역할에 과도하게 몰입 할 때, 성실함이 미덕이라고 믿고 하루하루를 너무 열심히 살때. 혹시 내가 뭔가 희생함으로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겠다.
<439쪽>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이야기들과 신들은 모두가 불완전하고 허점투성이인 데다 모순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 전부를 하나의 이야기에만 두지 않는다. 대신 여러 가지 이야기와 여러 가지 정체성의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바꿔가며 사용한다. 그런 인지 부조화는 거의 모든 사회와 운동에 내재한다.
<441쪽>
민족주의는 나의 민족은 고유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파시즘은 내 민족이 가장 우월하며 나는 내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443쪽>
악의 문제는 악이 실제 삶 속에서는 반드시 추악하지는 않다는 데 있다. 악은 사실 대단히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444쪽>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fascis’에서 나왔다. ’막대 다발‘이라는 뜻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흉포하고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치고는 별 매력 없는 상징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에는 깊고 사악한 의미가 있다. 막대 하나는 대단히 약하다.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개를 다발로 묶으면 부러뜨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는 각 개인은 보잘것없는 존재지만 집단으로 한데 뭉치면 대단히 강력하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454쪽>
자기 탐색의 과정은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 갈수록 점점 힘들어진다. 처음에는 우리가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단계는 쉽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은 더 어렵다. 궁극에는 우리의 욕망, 심지어 이런 욕망에 대한 반응까지 우리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의견이나 느낌, 욕망에 덜 집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 의지의 폭정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 만약 우리의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덜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환상이라면 무엇이든 실현하려 애쓰기보다 자기 자신과 정신, 그리고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
<455쪽>
이제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시대가 되어 이런 개인의 신화 제조 과정을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의 일부야말로 우리 정신이 하던 일을 컴퓨터에 아웃소싱한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완벽한 자아를 구추갛고 장식하는 데 무수한 시간을 쏟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창작물에 고착돼가고, 자신의 실체와 그것을 착각하는 것을 보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두렵다.
<456쪽>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페이스북 계정이나 자기 내면에서 하는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몸과 마음의 실제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466쪽>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경험을 서사구조로 이해하고 살았다. 하라리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얘기를 처음 접했을땐 당황스러웠는데, 자꾸 듣다보니 이제 거의 설득된 것 같다. 앞의 다른책에서는 가차없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했다면, 이번엔 좀더 자연스럽게 실용적으로 소개한 것처럼 느껴졌다.
21.명상_오직 관찰하라
<470쪽>
인생의 큰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콧속으로 숨이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아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기가 주고 난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수수께끼는 내가 죽고 난 뒤가 애라, 죽기 전에 생기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삶을 이해해야 한다.
<471쪽>
내가 숨 쉬는 것을 관찰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전까지 내가 읽었던 모든 책과 대학 시절 참석했던 모든 수업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정신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것을 통제할 능력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했음에도 내 숨이 콧속을 드나드는 것의 실체를 관찰하다 보면 10초도 지나지 않아 정신은 흩어져서 방황했다.
<473쪽>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 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이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걸음이다.
<480쪽>
자기 관찰은 결코 쉬운 적이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힘들어 질 수 있다.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인류는 자신에 관한 점점 더 복합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왔고, 그 때문에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알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려 할 때 일반적으로 발견한 것은, 그와 같은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제약 없는 탐구는 너무나 위험했고, 사회 질서를 전복할 우려가 있었다.
<481쪽>
앞으로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에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면 아직은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탐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회를 활용하고 싶다면 지금 실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1세기를 위한 제언의 마지막 주제는, 명상! 자기관찰(명상)이 너무 어려운 시대지만, 알고리즘이 우리를 지배할 날이 오기 전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탐사해야한다는 이야기. 호기심 넘치는 어린시절의 하라리, 어린시절부터 천재였네 싶었고 하라리의 개인사를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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