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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기

회사에서 나는 업무에 따라 여러사람에게 질문, 조언을
요구받는다.  나는 지금까지 친절한 직원평판을 쌓아왔기에

주로 사내 메신져로 나에게 들어오는 문의에 대해
정성껏(사무적 말투일지라도)답변을 해준다.
특히 메신져 대화내용은 증거로 남기때문에
늘 정확하게 답하느라 많이 애쓰고 있다.

내 업무를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다.

1. 내가 다른 부서에 지침을 주고 협조받아 하는 일
2. 여러 담당 중의 하나로  각자 맡은 일을 동일한 권한 내에서 해결하는 일

1번 유형은 언제나 항상 친절하고 정성껏 답한다.
내 고유업무이기도 하고 내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2번 유형에 대한 질문이다.
물어보는 사람과 나는 동일권한을 가진 담당자일뿐이다.

우리는 다 원거리에 있어서 서로 만난 적이 없다.
서로의 조직, 직급, 이름을 알고 사내 인사정보에
공개된 사진으로만 얼굴을 아는 사이다.


아주 사소한 절차 질문부터 복잡한 법 적용까지

다양한 내용을 나에게 메신저로 물어본다.
난 대체로 무미건조하게 답을 한다.
정답이 있는 경우 정답을 알려주고
답이 여러가지 일 경우엔 내가 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몇몇의 블랙리스트 메신저 질문자들이 있었고
최근 나는 좀 벼르고 있었다.

언제나 나에게 재차 확인받고서야 업무를 하는 담당들

이런 부류의 질문자들을 대차게 거절하기로
그래서 저번주 드디어
내가 거절의 말을 메신져로 쏟아냈다.
그 사연을 적어본다.

이 질문자는 대화체에서 물결이모티콘을 하나도 안쓰고
매우 사무적인 말투로 나에게 질문하는 직원이다. 우린 만난적도 전화 통화를 한 적도 없다(있나?)
그런데 주기적으로(무슨 일이 있을 때) 나에게 확인받는 질문을 한다.
그거 어떻게 했어? 난 이렇게 할 건데, 괜찮겠지?
너는 어떻게 할거니?

그 날은 메신져창에 안녕하세요. 이 말을 던지더니
내가 내용 확인도 안하는 상황에서
장문의 질문 몇가지를
그것도 번호로 매겨가며 쏟아내놨다.
미리 정리해놓은 것을 그대로 나에게 복붙한듯 보였다.

(실제 내용은 훨씬길고 당연히 존댓말이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글)
1.이런 상황이야. 그래서 우리 이래저래했어
2.근데 이거 문제될것 같아?
3.그렇다면 다음 보기중에서 어떻게 하는게 좋을 것 같은지 니 생각을 말해봐라.

메신져앱이 쉴새 없이 깜빡이며 대화가 쌓이는걸
30초쯤 지켜보다가 그동안 속으로 꾹 담아놓은걸

다다다 타자로 쏟아냈다. 나도 똑같이 번호매겨서.

1.안녕!
   인사하자마자 내가 보지도 않고 있는데
   번호까지 매겨가며 장문의 질문하는거 난 불쾌하다.

2.너랑 나는 같은 권한을 가진 각조직의 담당일뿐이고
  그 법 내가 해석해준다고해서 정답은 아니야

3.그래도 내 답이 궁금하다면

   만약 내가 너라면
   난 이렇게 할거야.

4.너 바쁜거 알아. 그래서 나도 지금껏 노력해서 니 질문에 답했어.

  너 나랑 일면식도 없는 사이잖아?

  근데 날 마치 네이버지식인처럼 대해서 내내 마음에 걸려서

  한번은 얘기하고 싶었어. 이런 얘기 너도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좀 조심해줘라.

저 담당이 나에게 깊이 사과해줘서
잘 마무리 되었지만
난 저 내용이 그대로 캡쳐로 돌아다녀서
서울담당 개싸가지 똘아이라고 소문이 나도 괜찮겠다
싶은 바람도 있었다.

나도 철부지 초보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나도 여러선배들을 붙잡고 물어봤다.
물어보기전에 미리 내 선에서 확인하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긴장하며 질문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초보들의 긴장까지 헤아려가며 친절하게 대했다.
물론 사회적 평판 유지를 위해 친절가면을 썼을 확률도 매우 높다.

거절을 해본적이 거의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는 특히 잘 못 한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있으면 몇일은 잠도 못잔다.
그래서 그냥 친절가면을 쓰고 편하다고 살아왔다.

 

이제 앞으로는 친절가면 내려놓고
거절을 연습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번일로 저 직원이 상처받았겠다는 걱정이
별로 안되었다.
저 일 이후 몇몇 블랙리스트 질문자들의 대화는
마음 편히 읽씹으로 일관중이다.

(메신져를 읽씹했더니, 전화가 왔지만, 친절을 싹 빼고

답변을 했다.)

나는 이런 심정이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물어볼것이 한개도 없으니
앞으로 나에게 물어보지마!'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거절하고

누군가와 척을 질수 있게 하는
용기 또는 힘, 배경을 생각해 본다.

내가 어떤 업무문제로 고민할 때 본인 일처럼 같이 나서서
공부해주는 내 분야 찐 동료 선후배들(손 꼽아 세워보니 6명)덕분이다.


세상에 날 좋아하는 사람만큼
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제야 받아들인다.
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걸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