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책 모순

여름 날 2024. 2. 24. 11:02

 
 
 
 
몇 해 전부터 책 모순에 대한 글들이 내 눈에 많이 띄었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 할 수 없어한다."
이 문장에 끌리기도 했고 서점에 가면 스테디셀러 소설코너에 항상 있어서 무슨 소설일까 궁금해졌고 꼭 읽어봐야지 생각만 했다. 어느 날엔가 막상 읽으려고 했을 때에는 아!  전자책 출판이 안됐군!
도서관에 종이책 대여를 하려고 보니 또 대기가 많았다.
 
2월 독서모임 책으로 정해놓고 이번엔 꼭 읽어봐야겠다 다짐했다.
옛날 표지 디자인으로 겨우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연장하려고 했더니 이미 또 누군가 예약을 한 상황이였다.
설 지나고 다시 대출해야지 했는데, 또 대기
그래서 결국 종이 책을 샀다는 얘길 길게도 쓴다.
종이 책 보관이 너무 버거워서 거의 안사지만, 샀다. 이 책은 내가 두고두고 다시 볼 것 같다.
 
처음 소설을 읽고 책을 덮는 순간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소설을 더욱 열심히 마음 놓고 읽으리라!"
나는 언제나 나를 고치고 가꿔서 변화하고 싶은 사람이였다.(지금도 그런 열망을 다 버리지 못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경제적 부를 얻었다는 그래서 이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보면서,
한가하게 소설이나 에세이나 읽고 있는 나 스스로를 비하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이 나에게 큰 해답을 주었다.
 
소설을 자기계발서로 생각하고 읽어도 되겠구나! 하는 나만의 답이다.
이 소설 속 인물은 매우 입체적인 자기계발서다.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겠다.
모순 속 주인공 안진진과 그 주변 인물들 모두에게 공감하면서 각자의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내 주변 인물의 삶임을
행복이라고 생각한 사건은 나를 불행으로 이끌고 가고
불행이라고 슬퍼하고 좌절한 시간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터닝포인트였음을
행복과 불행은 결국 한몸이고, 인생은 결국 모순임을 배운다.
 
안진진(25살)
안진진의 아버지는 주정뱅이에 성격파탄자이고 집나가서 행방불명된지 오래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양말 장사를 한다.
남동생은 철이 없고 장래희망이 조폭이다. 
만나는 남자가 두명있다. 
앞으로의 삶이 예측 가능한 현실적인 회사원과  작은 들꽃에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는 낭만적인 사진작가(가난함)
얼핏보면 사랑은  낭만인가? 결혼은 역시 조건인가? 에 대한 비유같지만 모순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안진진의 주변인물 중 나는 이모에게 많이 공감하기도 했다.
안진진의 이모(안진진의 어머니의 쌍둥이 동생)는 소설을 읽고 꽃을 사는 낭만적인 몽상가로 대표되는 인물인다.
아 꼭 나같은데? 하며 나를 많이 되돌아 보게 했다.
 
 
두번 째로 책을 읽을 때 나는 <책은 주로 소설책을 읽고 무용한 꽃을 사는 40대 아주머니로서의 감상>을 쓰려고 했다.
소설에 나오는 꽃의 이미지가 낭만, 몽상같은 거랑 연결되어 지면서 이것은 너무 나 같다는 느낌이였는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결국 인생의 핵심은 균형감각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조금 철 없이 낭만과 몽상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아직 더 큰 불행이 찾아오지 않음이니까
현실과 계획성의 세계에서도 균형을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겠구나.
그럼에도 꽃에 대한 부분을 따로 밑줄 긋기로 정리 해본다.  
(낭만적인 몽상가들에게 공감되면서도 정신차리라고 말하고 싶은 내 양가감정에서도 모순을 느낀다)
 
"세상에 너한테 오늘 같은 날 이처럼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다니, 이 꽃 먼지가 되어 스러질 때까지 나 영원히 간직할 거야."<28쪽>
 
이모가 멋진 크리스털 화병을 선생님께 드렸다. 그때 이모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보라색 라일락을 한 무더기 꽂으면 예쁠 것 같아서 사봤어요." <37쪽>
 
"이거, 실풀꽃이야. 실처럼 가늘고 눈처럼 흰 꽃이 하늘을 향해 총총 피아있는 모습이 너무 예쁘지. 이런 몸을 하고 바위틈에서 자란다면 믿겠니?
자 이건 흰젖제비꽃. 만나기 정말 힘든 꽃인데 운 좋게 찍을 수 있었어. 이름처럼 너무나 소박해서 좋아."
 
"이건 큰들별꽃.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고 계곡을 건너다가 기슭에서 이 꽃을 발견했는데...
김장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푸른 잎사귀 속에 숨어서, 저토록 아련한 큰들별꽃들이 깜박깜박 조용히 빛나고 있는 거야. 안진진. 나, 그냥 울어버렸다. 너무 작아서.. 아니, 저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싶으니까 무지 눈물이 나대..." <102~103쪽>
 
"비비추 무더기의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대면서 김장우는 어쩔 줄을 모른다...
깊은 산 숲 속에서도 제 흥에 겨워 저렇게 혼잣말을 하며 사진을 찍을까. 숨어있는 야생화들을 찾아 온종일 걷다가 어느 순간 큰들별꽃 같은 작고 소박한 꽃을 만나면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 아무도 없이 너 홀로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느냐고 꽃을 쓰다듬으며 울 수도 있겠지....<116쪽>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따라 이모는 아름다웠고 활기에 넘쳐있었다. ...
행복했던 이모는 넓은 집 안 곳곳에 빠짐없이 꽃을 장식했다. 어머니는 죄 없는 꽃부터 비난하고 나섰다. 
"무에 그리 너절하게 꽃들을 늘어놓았니? 안 그래도 마당 천지가 다 꽃이구만. 참 할 일도 없다." <136쪽>
 
"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193쪽>
 
 
인생이 한가한 이모가 읽는 책은 소설(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인가?) 여유가 없는 엄마가 읽는 책은 그때 그때 삶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서(일본어 첫걸음 등)로 대비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한가하고 잘 살고 있구나 생각해보기도 했던 부분이다. 한편으로 소설과 실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취향차이일 수도 있겠다. 문학류나 읽는 나를 조금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 내 편견일 수도 있겠다.
 
이모도 책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읽은 책을 이모가 읽은 적이 없고, 이모가 읽은 책을 어머니가 읽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진진아 너 다리를 찍는 사진사 이야기 아니?...
"엄마도 소설책 읽어요?" 이모가 그럴 수 있다면 어머니라고 못할 것이 없다. 나이가 들면서 내 어머니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63쪽>
 
<현실주의자와 몽상가 사이에서 _ 조건과 사랑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왜 사랑 앞에서 솔직해 질 수 없는가?>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여 결혼까지 하고 애 둘낳고 15년째 살고 있는 아줌마로서
25살 안진진이 너무 똑똑해서 놀랍다. 이 책이 나왔던  98년도 그때 고등학생이였던 내가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25살에라도 좀 읽었으면 좋았을텐데하고 가정법과거를 강하게 써본다.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이 남자 나영규와 앉아 있으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현실이 보인다. 너무나 일목요연해서 어디 제멋대로인 꿈이나 상상 같은 것은 전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잘 정리된 남의 집보다 적당히 너저분한 남의 집이 묵어가기에는 훨씬 편한 법이다. <77쪽>
 
나영규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확실히 김장우에게는 있었다. 나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195쪽>
 
나는 전율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대사였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난동을 부리던 그날 밤, 아버지가 말했었다. 당신은 나를 가두는 간수 같았어, 당신은 몰라, 그 절망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행방불명인 아버지가 내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마침내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어머니를 사랑했으므로 나와 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또한 절대적이었을 것임을. 우리 모두를 한 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러므로 내 아버지는 세 겹의 쇠창살문에 갇힌 것이었다. 아버지가 탈출을 꿈꾸며 길고 긴 투쟁을 벌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205~206쪽>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218쪽>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김장우와 함께 떠났던 서해바다에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 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219쪽>
 
그러나 나는 그런 김장우의 얼굴에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읽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김장우에게도 알지 못하는 생의 다른 길이 운명적으로 예비되어 있을지 몰랐다.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알아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만, 사랑조차도 넘쳐버리면 차라리 모자란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277쪽>
 
<담담하고 냉소적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안진진의 문장들> 다 너무 좋아서 힘들게 다 타이핑했다.
타이핑하면서 여러번 곱씹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며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와 달랐던 점은 이종사촌들에 대한 질투심을 감쪽같이 잘 숨기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질질 흘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완벽한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142쪽>
 
그렇지만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3쪽>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네가 하는 박사 공부는 그렇게 단순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176쪽>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쪽>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229쪽>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32쪽>
 
 
아마도 주리에게 엄마의 죽음은 생애 유일했던, 그리고 최대의 고통이었으리라. 이모는 자신의 죽음으로 자식들의 삶이 완벽하게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막아냈다. 주리와 주혁은 평생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반추하며 살아갈 것이었다. <292쪽>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 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296쪽>
 
<불행의 과장법>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억척스런 어머니, 이런 어머니도 내 주위에 매우 많아서 슬픈데, 진짜 이것이 인생이다 싶다.
안진진 어머니의 '불행의 과장법' 기억했다가 필요한 순간이 올때 써먹으리라.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152~153쪽>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젠 완전히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고 쉴 새 없이 헛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도무지 철들 기미를 보이지 않은 아들도 어머니의 삶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게 도왔다. 부쩍 말수가 줄고 홀로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 안진진의 우울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준다. 
아버지 시중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가게에 점원 한 사람을 두었다. 얼마 되지 않은 수입에서 점원 월급까지 나가야 하니 그것 또한 어머니의나날을 긴장으로 채워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느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293쪽>
 
 
<안진진의 아버지>
성격파탄자 주정뱅이, 사랑앞에서 마구 도망치는 못난 인간, 이런 사람 아버지들중에 꽤 많다. 내 주위에도 종종 이런 아버지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게 다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지경이다.
우리 엄마는 여전히 아빠를 멋진 남편으로 좋은 가장으로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부부싸움의 장면들이 생생함에도, 엄마는 모든 기억을 다 좋은 쪽으로 각색하신듯)
그럼에도 그 속에도 사랑이 있었다네. 그래서 더욱 슬펐다. 안진진 아버지가 제일 이해안가는 인물이고 욕먹어 마땅했지만, 아 그럴 수도 있엤겠다! 싶었다.
 
"해질 녁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이 저켠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94쪽>
 
 
뒷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을 여러번 읽었다. 그 중 특히 와 닿는 글이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상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인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모순을 읽으면서 나의 엄마와 이모의 인생을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연년생 자매이자 쌍둥이처럼 외모가 닮은 현재 60대 후반의 두 사람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다.
이것은 정말 소설이 아니라 실화지 싶었다.
한 사람은 부자였다가 가난해지고 아프고, 또 한사람도 부자였다가 가난해지고 지금은 약간 여유로운 채
후반부 인생은 아직 써내려가는 중이다.
 
몇 년전에 캠핑장에 여동생네와 엄마를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버너에 불을 붙여야하는데 그게 너무 무섭다고 나랑 여동생이 벌벌 떨면 못하고 있을 때
(일단 부탄가스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너무 무섭다. 불꽃 튀는 것도 무섭고)
우리 엄마가 "으이구 이런것도 못해!" 하면서 척하고 불을 켜는 것을 보고 와 역시 엄마!  
 
그 때 엄마가 "나도 예전에 이런거 하나도 못했어 공주처럼 살았지, 누가 다 해줬으니깐 내가 최고 인 줄 살았지 애기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근데 남편 갑자기 죽고 애 셋데리고 먹고 살아야하는데 어떻게 내가 다 해야지!, 너희들도 지금 다 못해도 돼 언젠간 필요하면 다 하겠지!" 하시길래.
 
나는 "그럼 엄마는 이런거 모르고 못하던 시절이 좋아 아니면 산전수전 다 겪어봐서 인생 통달한 지금이 좋아?" 물어봤다.
나는 엄마가 행복과 불행 골고루 맞보고 성장한 지금이 좋다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 교과서적인 스토리가 마음에 드니까.
그러나 엄마의 대답은 
"당연히 이런거 다 모르고 공주처럼 사는게 좋지!"
여동생이랑 나랑 엄마가 동시에 빵터지면서 웃었던 적이 있다. 
 
나는 언제나 주인공으로 행복하게 살고 불행이 남의 일이면 좋겠지!
불행은 나에게 찾아오는건 이해 할 수 없는 모순적인 태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요즘 나는 아 심심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을 번쩍 차린다.
내가 불행을 부르고 싶은건가. 
심심하고 지루한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다시 한번 절절히 상기한다.
(불행속에 행복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불행을 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