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기

결혼 10주년 여행 2.

여름 날 2020. 9. 11. 06:55

결혼 10주년 여행이 남긴 것들

신혼 때는 결혼 10주년쯤 되면 정말 온 가족이 하와이 여행 가게 될 줄 알았다(예산 계획 없이도)

물론 맘만 먹으면 빚을 내서라도 갈 수는 있었겠지만,
여행지로 이동하는 동안 아이들 케어(징징댐, 짜증 등등)를 생각만 해도
아 이건 고행길이다. 싶어서 포기 한 것도 있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짐작으로 회피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결혼 10주년, 남편과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을 정리해 본다.

1. 끼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다.

여행하면서 싸울까봐 그래서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질까봐 걱정했는데, 전혀 그럴 일이 없었다.
여행에서 내가 화 나는 패턴을 최근에 발견 했다.  

신혼 여행부터 지금까지 늘 여행지에서의 내 삐침의 이유는 끼니에 대한 나의 집착과 남편의 무관심이였다.


지금까지 나는 식사시간 준수가 젤 중요했던 사람으로, 삼시세끼중에 하나도 소홀함이 없도록 챙겨먹어야 하고 공복감을 불쾌하게 받아들여서 매우 화가 난다.
그럴 때 남편이 옆에서 " 밥 한끼 안먹으면 죽냐?" 라던가. "나는 별로 배 안고픈데", "아침은 대충 때우자". 
이런 말을 하면 그 날의 여행은 망쳤다고 봐야한다.

작년 봄에 설악산에서도, 또 여름휴가 때 제주도에서도 그랬다. 
아침 먹을 식당을 검색 중인데, 마땅한 곳을 못 찾아서 조급해 질 때에도
막상 찾았는데, 너무 맛이 없어서 매우 화가 났다.
그 기분을 바로 비워내지 못해서 서로 힘들어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우리의 밥 시간은 내 스스로 잘 챙겨서 서로 불쾌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조식은 필수로 포함해서 숙소를 예약했고, 어떤 식당이 있는지 주요 지명과 식당이름을 익혀 갔다. 

그런데 남편과 1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이제 나도 남편의 무계획에 적응이 되었는지, 
지나가다가 아무데나 들어가서 먹어도, 
맛이나 서비스가 실망스럽더라도
크게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참 별거 아닌거에 에너지 쓰면서 살았다 싶은 깨달음이 이제서야 왔다.
난 내 선택, 그 선택이 아주 사소한 점심 메뉴 결정일지라도 그게 실패하는게 너무 두려워서(?)
늘 고민하고 망설이느라 새로운 경험을 못하고 현재를 즐기지 못했다.
더불어 아침에는 입 맛이 없어서 아침은 안 먹어도 되는 남편을 이해하느라 10년이나 걸렸다.
남편의 입장에선 끼니에 집착하는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거란 것도 이제야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식 2번, 굳이 찾아가서 줄 서서 먹은게 3번, 계획 없이 지나가다가 들어 간 게 2번
대체적으로 다 만족스러웠다. 

맛집 줄서기를 싫어하는 남편은 이번엔 무조건 나에게 맞춰주었다.
가격이 싸니까 둘이서 여러가지를 시켜서 맛 보았는데,
음식 남기는거 못 보는 내가 남편에게 더 많이 먹기를 권하는 바람에
남편은 과식으로 마지막 날엔 좀 고생을 했다.

2. 사진을 거의 안 찍다.

대학때 친구들이 내 사진 찍어주느라 많이 귀찮을 정도로 나는 사진찍히기를 좋아했다.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의 의미는 "나 지금 정말 행복해!" 였기 때문에 사진이 많은 시절은 그때 내가 행복했구나 하는 반증이고, 또 반대로는 나 지금 행복한 척이라도 해야해! 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진찍히기에 대한 내 열정은 정확히 35세이후로 급격히 소멸해서, 지금은 사진 찍히기를 극도로 경계 할 정도다.
아마도  더 이상 예전 만큼 내가 예쁘고 어려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의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다.

여행을 정리하려고 사진을 찾아봤는데, 내 폰에는 대만에서 찍은 사진이 몇장 뿐이다.
내 사진은 그렇다고 치고, 특히 음식 사진이나 유명관광지 인증사진을 거의 안 찍었다.
그냥 눈으로 구경하면서 "여기서 보고 가면 되지, 언제 또 본다고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나?" 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추억 할 사진이 없다 보니 새삼 아쉽다.

나랑 반대로 요즘 부쩍 인증사진에 집착하는 남편의 사진만 내 폰에 몇장 있다.
혹시나 해서 남편 폰의 사진들을 봤다.
남친시절 사진찍히기 좋아하는 여친(나)때문에 사진찍기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이제 찍사 노릇 졸업해서 그런지 내 사진도 안찍어놨다(내가 거부하기도 했지만)
몇장 찍어 놓은 사진이 마음에 안들어서
"사진을 왜 이렇게 찍어놨어?" 하면서 한바탕 구박을 했다.

 

 

 

내가 찍은 배경중심 사진(중정기념관) 

 

 

 

 

이것도 찍어줘~설정해서 내가 찍어준 사진

 

 

 

 

역시 내가 찍은 배경중심 남편 사진(어딘지 모름)

 

 

 

 

배경중심도 인물중심도 아닌 남편이 찍어 준 내 사진
배경중심도 인물중심도 아닌 남편이 찍어준 내 사진2

 

 

평소에도 안찍는 사진, 여행가서라도 이젠 좀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사진을 보니 거기에서의 날씨가 생각났다.
1월의 대만 날씨는 추웠다가 따뜻했다가 변덕이 심했지만, 한국의 늦가을 날씨랑 비슷했다.

3. 걷는 즐거움(우리의 공통점), 동반자 

우리의 타이베이 여행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계획 "걷기"였다.
대충 지명만 익혀갔고 위치 파악은 안했기 때문에 동선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지만,
예스지를 안갔기 때문에 시간이 많았다. 

남편은 평소에도 엄청나다 싶은 거리를 걸어서 다니는 생활 밀착 운동인이다.
도심 걷기를 당연히 좋아했는데, 나랑 둘이서 이렇게 걸어보기는 처음이라
정말로 다리가 안아픈지 괜찮은지를 여러번 물었고, 내가 너무 잘 걸어서 기특해(?)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우린 매일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여행에서 서로의 부족한 점과 넘치는 것을 발견하고 우리는 진정한 동반자이자 경제적 공동체라는 생각도 했다.

이건 나에게는 너무 재미있는 얘기인데,

남편과 나는 영어로 말을 잘하고 싶어서 매일 영어공부에 매진(한다고 생각하며 사는)한다.

사실 여행이 아니면 영어로 말 할 일이 거의 없는 편이라 요즘의 나는 회화의 필요성은 거의 버렸고

독서 영역의 확장을 위해 영어공부를 하는 편임에 비해, 남편은 무조건 입트는 영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입트는 영어로 입이 트인 남편은 정말로 여행영어에 최적화(?)상태를 만들었다.

특히 교통수단에서는 특화되어 있다(일하면서 영어 정말 많이 쓴다고해서 비웃었음).

물론 내가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남편이 있어서 매우 편했다.

 

그런데 이 남자의 영어엔 크나큰 구멍이 있었는데, 리스닝이 안된다는 사실!

질문은 했지만, 답은 이해가 안되는 상황.

하지만, 나는 리스닝엔 또 강해서 남편은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을 이해하고

마치 우화에 나오는 장님과 다리 다친 사람처럼(?) 서로 의지해서 여행을 했고

나이 들어서도 같이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생겼다.


당시엔 별로 재미도 없는 것 같았고 대만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도 안했는데,
남편이랑 이 여행 얘기를 자주한다. 

그때 재밌지 않았어? 우리 진짜 많이도 걸었지!
당신이랑 둘이 그렇게 걸어본적 없었던것 같아!
우리 또 가자!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