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_서머싯 몸

나는 서른살 전 후까지 세계문학에 대한 사대주의를 가졌다. 늘 읽어야 할 리스트가 넘쳐났는데, 이 책은 늘 제목만 알고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제목의 달을 진짜 달로 생각하고 달로 떠나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추측만 해봤다. 책 '여덟 단어'를 읽을 때, 이 책이 언급되고 그때서야 줄거리에 궁금증이 생겼고 대략 5년전쯤에 읽어 보았다. 그 당시 이 책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나는 뭘 택해야하지 진지한 고민을 하게 했다. 더 정확히는 아!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이루고 싶은 이상이 없음에 우울했던 것도 같다.
이번에 독서모임 멤버들과 다시 읽게 되었다. 어머나! 이 책이 이렇게 재밌는 책이었나? 새삼 놀랐다. 모든 등장인물이 공감 안 되는 인물이 없었다. 정말 재밌게 읽어놓고는 막상 독후감을 쓰려고 할 때엔 또 다시 이상과 현실이란 두 단어에만 매몰되었다. 이상과 현실에서 나는 무얼 선택해야하지? 아 나는 이상이 없네?, 음 나는 왜 이루고 싶은 꿈이 없을까?에 사로잡혔서 갑자기 우울할 지경이였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이면서도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예술가의 열정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현실의 조건 나는 절대 포기 못하겠다. 역시나 나는 평범한 인간이구나! 깨달으며 뭔지 모를 불만족감에 시달렸다. 이후, 독서모임에서 책 수다를 한바탕 떨고 나서야,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들이 공유되고 풍성한 기분으로 마무리 하며 이 책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었다.
이상과 현실에서 타협하는 것도 삶의 기술이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늘 따라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적정선을 찾는 것도 자기인생의 예술일 것이다. “욕심부리다가 두마리 토끼 다 놓친다!” 이 말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이상이냐 현실이냐 하나만을 선택하는 극단적 상황만 상상하지 말고 이상이 곧 현실이 되는 삶도 충분히 꿈 꿀수도 있겠다.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47세면 가족들에게 해방될 만도 하겠네? 이런 생각까지도 해보면서, 우린 아직 도전해도 되는 나이라며 위로도 했다. 서머싯 몸은 45살의 나이에 이 책을 출판했는데 당시 그는 47세는 뭔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가 91세에 별세했음을 아는 독자입장에서 바라보니, 그때가 딱 인생의 중간나이였을 뿐.
서양의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제국주의가 너무 불편한데, 이 책에서도 프랑스령 타히티를 마주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책이 출판된 해는 1919년도이다. 1919년과 자동으로 연상되는 삼일운동과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 나는 왜 이런거에 반응하게 될까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작용이 많았던 독서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책은 재미있다. 각 등장인물 누구에든 촛점을 맞춰 읽든지 아주 재밌다. 가족을 다 버리고 그림공부하러 떠난 나쁜남자 스트릭랜드,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스트릭랜드 부인, 타인 작품의 예술성을 알아보는 심미안을 가졌지만 평범한 그림밖에 못그리는 스트로브,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블란치 그리고 마지막에 잠깐 나오지만, 내가 바라는 바로 그 인생이라고 생각한 브루노선장까지
밑줄 그은 문장 정리(민음사 2016년 인쇄판본)
<10~11쪽>
인간은 신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타고난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조금이라도 다른 인간이 있으면 그들의 생애에서 놀랍고 신기한 사건들을 열심히 찾아내어 전설을 지어낸 다음, 그것을 광적으로 믿어버린다. 범상한 삶에 대한 낭만적 정신의 저항이라고나 할까.
유발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읽고 있는 시점이라 이야기를 믿는 호모사피엔스 특성이 두배로 깊게 마음에 닿은 문장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와 그의 가정에 대한 묘사
<34쪽>
그저 선량하고 따분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훌륭한 시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 정직한 중개인일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36쪽>
하기야 수많은 부부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산다.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37쪽>
내가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런 정도였다고나 할까.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로서 그 안에서 그것에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이게 마련인데 그들 역시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마치 몸 안의 세포들 같았다. 필수적인 요소이면서 건강한 상태에서는 더 중요한 전체 유기체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스트릭랜드 가족은 중산층의 평균적인 가정이었다.
<76쪽>
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전혀 상관않는 사내가 여기 있었다. 그러니 인습 따위에 붙잡혀 있을 사내가 아니었다. 이 사내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자는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평범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모습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77쪽>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 안에 들여 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비난에 정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양심을 이런 시선으로 볼수도 있구나! 평범한 사람이 양심 없는 사람에게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는 이유
착하다고 설명하기엔 부족하지만 너무 웃픈인물 스트로브. 세상을 보는 관점에 핑크필터가 장착 된 사람들을 볼때 내가 느끼는 기분이다.
<92쪽>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환상이 줄곧 그를 사로잡고 눈을 현혹시켜 그로 하여금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던 모양이다. 현실은 무자비했지만, 그는 늘 영혼의 눈으로 낭만적인 산적이며 그림 같은 유적이 가득한 이탈리아를 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린 것은 하나의 이상이었다. 보잘것없고 평범하고 낡아빠진 것임에 틀림없었지만, 이상은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향한 마음 덕분에 그의 성격은 특이한 매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98쪽>
그는 변명하듯 웃었지만 마음속의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도 자기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남의 그림을 논평할 때는 그처럼 정확하고 참신한 비평적 감각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 그림에 대해서는 왜 그처럼 진부하고 통속적인 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만족해 버리고 마는 것일까.
<163쪽>
더크 스트로브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좀 초췌하고 여위기라도 했더라면 동정을 살 수도 있었으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뚱뚱한 데다 불룩한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불그레했다…. 게다가 배까지 나오는 중이어서, 슬픔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는 때보다 더 돈 많은 장사꾼처럼 보였다. 때로 그처럼 사람의 외형과 정신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건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착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늘 실수투성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진짜 훌륭했지만 평범한 그림밖엔 그려내지 못했다. 감성은 유별나게 섬세하면서도 행동은 투박했다. 남의 일에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그렇지 못햇다. 그처럼 허다한 모순을 안겨주고선 이 사내로 하여금 당혹스럽고 냉엄한 세상에 맞서게 한 걸 보면, 조물주의 장난도 잔인하기만 하다.
이런 인물들도 이 세상엔 많이 있는 것 같다. 스트로브 부부가 알콩달콩 사는 모습이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른들 같아서 답답했다. 그들의 환상이 어서 깨지기를 바라면서 읽기도 했다.
<159쪽>
나는 스트릭랜드가 블란치 스트로브와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 거기에는 어떤 겸양이 존재한다. 스트릭랜드에게서는 그런 성향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랑에 감상이 전혀 배제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어느 누구보다 그런 약점에 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 내게는 그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너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사랑이 전부이던 이십대의 나에게 사랑에 대한 문장들은 전혀 와 닿지 않았다(그땐 모든 일들이 나 자신을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믿는 유아적 사고를 하던 시절이므로). 그런 감정들이 가라앉은 지금은 이런 정의들이 너무 이해가 되고 사랑이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본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나는 나이 먹는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스트릭랜드의 광기, 예술에 대한 열정, 상반된 평가
<204쪽>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너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 내가 자기 것이 되어주기만 바랐지. 하기야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오. 난 혼자 있기를 바랐거든.
<206쪽>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을 상대방이 얼마나 존중해 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미치는 나의 힘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처럼 사람의 자존심에 아픈 상처를 주는 것은 없을 테니까.
<211쪽>
그림을 보게 되면 그의 기이한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잘못이었다. 그림을 보고 나니 그 사람이 불러일으켰던 놀라움이 더욱커질 뿐이었다. 그의 실체로부터 더 멀어진 느낌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지금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힘이며,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지는 불투명했다.
<221쪽>
그는 미장이니 목수니 하는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일은 더 열심히 했다. 대개의 사람들이 생활을 품위 있고 아름답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돈에도 무관심했다. 명성도 안중에 없었다. 우리들 같으면 대체로 세상일에 적당히 타협하고 말지만 그는 그러한 유혹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그를 칭찬할 수는 없다. 그는 그런 유혹조차 느끼지 못했다. 타협이란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파리에 살면서도 그는 테베 사막에 사는 은자보다 더 고독했다. 그가 친구들에게 바란 것은 오직 자기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것에 온 마음을 쏟아부었다. .. 스트릭랜드는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긴 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가 위대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223쪽>
그가 흥미를 가졌던 화가가 딱 하나 있었는데, 뜻박에 브뤼겔 1세였다… 그는 인간을 그로테스크하게 보는 듯했다. 인간이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인생은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한 일들의 뒤범벅이고 웃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하지만 웃으려니 슬펐다. 내가 브뤼겔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그가 다른 매체로 표현하면 더 나았을 감정을 자신의 매체로 표현하고자 안감힘을 쓰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스트릭랜드가 그에게 공감했던 것도 바로 그 점을 어렴풋이 의식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두 사람은 모두가 문학에 더 적합한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 같다.
브뤼겔(브뤼헐)의 그림과 고갱의 그림을 떠 올려본다. 문학에 적합한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애쓴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문장을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문학적이기도 하구나!
작중 화자의 진술들에서 여러 인생을 모습을 보며, 지금 내 나이(어느새 중년)에 적합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상이니 현실이니 둘 중 무얼 선택하든 다 개인의 자유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너의 삶을 살아라! 이런 결론을 내 볼 수도 있었다.
<245쪽>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편안하게 정착하는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던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 그의 태도와 정신에는 어딘지 용감하고 담대한 면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을 희망의 분위기로 끝내고 싶었다. 그러므로써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을 강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되었다.
<259쪽>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277쪽>
나도 나름대로는 예술가였다고. 내게도 그 친구를 움직인 그럼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친구가 그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나는 인생으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278쪽>
그는 겁 없는 아내와 몇 명의 토박이를 데리고 섬에 상륙하여, 곧 집을 짓고 관목들을 베아낸 다음 야자수를 심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불모의 땅이었던 섬이 이제는 아름다운 동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