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호모 데우스_유발 하라리

여름 날 2025. 1. 5. 20:49



2016년도 초에 사피엔스를 읽었다. 그때의 감동은 이런 것이였다. "와! 어떻게 이렇게 역사를 후려쳐서 꿰뚫을 수 있지?"(고상한 표현으로는 '거시적 역사 관점'으로 서술했구나! 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 다음 해(우리나라 출간 기준 2017년) 나온 '호모 데우스' 를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최근에 '넥서스'를 읽었으므로 유발 하라리의 이전 저작을 읽는 것은, 2024년 미래인의 입장에서 2017년의 유발하라리의 예언의 맞고 틀림을 추적하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읽고보니 7년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지만 기술의 발전은 분명 크게 있었다. 7년 전엔 빅데이터란 단어가 매우 트랜디하고 미래적으로 느껴졌는데, 이젠 빅데이터란 말은 흔해서 언급도 안되는 것 같다. 호모 데우스에서 제시한 미래 시나리오가 지금 시점에서 어디까지 들어 맞고 있는지 확인 불가능하지만, 그가 예측한 경로에 사피엔스가 진입한 건 확실해 보였다.
 
질병, 기아, 전쟁을 극복한 사피엔스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인류의 새로운 의제는 무엇일까? 호모데우스에서는 이제 인간은 불멸, 행복, 신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하며 다시 한번 인류의 역사를 훑어나간다. 이번에는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역사를 짚어본다고 나는 느꼈다. 과학의 발견들로 중세시대의 종교는 힘을 잃고 근대가 시작되었다. 그럼 이제 종교의 영향력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사피엔스는 그 종교의 자리에 다른 개념을 대체해 놓았다. 지금 우리가 믿는 자유주의, 인본주의, 개인주의가 모두 중세시대의 종교와 유사한 개념이다. 사피엔스는 세계를 새롭게 의미 부여하여 체제를 유지 시켜왔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더 발전하고, 특히 생화학 분야의 연구결과로 이제 인간은 알고리즘의 명령을 따르는 유기체일수도 있다고 한다. 사피엔스가 믿는 인본주의의 핵심인 고유한 자아와 자유의지 개념이 붕괴직전이다. 앞으로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과 별 차이없는 존재가 되거나 알고리즘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어 소수 엘리트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신흥종교는 바로 데이터교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하라리는 데이터교가 지배하는 섬뜩한 세상을 맛보기로 보여주며 책을 끝내고 독자에게 질문 3가지를 남긴다. 
 
1.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이 질문에서 1번에서 완전히 막혀버렸다.(2번과 3번은 책 넥서스를 읽으면 좀 짐작이 된다. AI에겐 의식따윈 필요없을 수도 있다는.. )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만을 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것은 내가 믿는 이야기를 종교적 측면에서 바라보기였다. 나는 개인의 경험과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책을 읽고 후기를 적을 땐, 그 책을 선택한 이유와 그걸 읽은 내 느낌이 제일 중요하다. 지금도 호모데우스를 읽고 내 기분에 빠진 채 나만의 느낌에 꽂혀서 이걸 글로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다. 무엇보다 나의 경험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자유의지의 개념도 믿는다. 모든 것은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는 많은 책들은 '너는 할 수 있어', '이렇게 하면 인생이 달라질거야" 라고 외치는 것들이다. 책을  읽으며 나의 매일 루틴을 사수하고자 노력하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나의 발전을 소망한다.  인생의 크고 작은 사건에서 나만의 서사를 만들고 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마치 내가 믿는 종교의 교리같다.
 
그런데 이것이 다 허상이자 착각일수도 있다니!  우리가 고통을 견디는 이유와 거기에 부여한 의미. 이런 것들 없이 인간이 살수 있을까? 자유의지가 없을 수도 있다는 발견들이 너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 말을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니다. 현재 생명공학분야의 연구로 밝혀진대로 나 조차 모르는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행동경제학의 심리실험에서도 보여지듯이). 다만 나는 진화론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자유의지가 없음을 인정해야하는 것이란걸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그동안 나는 자유의지도 진화에 포함된 것일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건 논리의 모순이였다.) 나는 현대인으므로 천동설이나 창조론을 믿는 중세시대 사람을 어리숙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이야기들(개인의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자유의지, 고유한 나)도 어느 시점엔 잘못된 사실로 밝혀질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시대의 정신을 벗어나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유발 하라리도 대부분의 책에서 과거 역사는 거의 80프로쯤 이야기하고 20프로만 예언해 보는거겠지 싶었다. 물론 과거 얘기 80프로와 미래 예측 20프로의 연결 그 자체가 매우 기발하고 재미있다.
 
자유의지가 없는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했지만(일단 인간의 마음에 대한 다운그레이드가 필수적이겠다), 이제 책을 덮으면 나는 늘 해 오던 방식으로 내 믿음을 강화하면서 살 것이다. 마치 진화론을 믿으면서 유일신도 믿는 사람처럼, 자본주의 만능성장을 외치면서 동시에 성장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환경보호를 걱정하는 사람처럼 모순적인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인간은 인지부조화가 특장점이니까). 인간이 더 행복해지는 방법의 핵심에는 욕망의 크기를 적당히 조절하는데 있다고 믿는다. 제발 사피엔스가 신이 되려고 하는 욕망 그 자체를 다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사피엔스나 넥서스와 비교했을 때, 호모데우스가 제일 흥미롭고 재밌었다고 느껴질 만큼 술술 읽었다. 매일 읽고 나는 이렇게 느꼈어!라고 적어보는 나만의 시간씀이 헛짓일리 없다고 믿으며  밑줄긋기 정리해 본다.
 

1.인류의 새로운 의제
<32쪽>
하지만 지금은 지식이 부의 원천이다. 유전과 밀밭은 전쟁으로 정복할 수 있지만, 지식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없다.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면서 전쟁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전쟁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물질기반 경제를 운영하는 지역, 예컨대 중동이나 중앙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나게 되었다.

<38쪽>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것을 제대로 평가할 때 얻게 되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 바로 역사에는 공백이 없다는 것이다. 기아, 역병, 전쟁이 줄고 있다면 다른 과제가 인간의 의제에 올라와야 한다… 과연 무엇이 기아, 역병, 전쟁을 대신해 21세기 인류의 최상위 의제에 오를까?

<39쪽>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할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53쪽>
복지제도도 원래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기획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국민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을 때, 그의 주된 목적은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55쪽>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최고선으로 규정할 때 제자들에게 행복해지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경고했다. 물질적 성취만으로는 만족이 오래가지 않는다. 돈, 명예,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면 비참해질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적당히 먹고 마실 것과 성욕을 억제할 것을 권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진탕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깊은 우정이 더 큰 만족을 준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으로 가는 고행길에 오른 사람들을 안내하기 위한 행동수칙을 정리했다.

<58쪽>
두 개의 튼튼한 기둥이 행복의 유리천장을 떠받치고 있는데, 하나는 심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인 것이다. 심리적 수준에서 보면, 행복은 객과적 조건보다 기대치에 달려 있다. 우리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 만족하지 않는다. 실제와 기대가 일치할 때 만족한다. 나쁜 소식은 조건이 나아질수록 기대가 부풀어오른다는 것이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인류가 겪은 것처럼 조건이 확 좋아지면,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대치가 높아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성취하면 할수록 불만이 커질 것이다.

<59쪽>
어쩌면 행복의 열쇠는 경기도 금메달도 아닌, 흥분과 평안의 황금 배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따분함 사이를 오가며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인 상태로 살아간다.

<67쪽>
그러니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쾌락을 빠르게 뒤쫓을 것이 아니라 놓아줄 필요가 있다. 행복에 대한 이런 불교적 시각은 생화학적 시각과 공통점이 많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양측이 꽤 다르다.
📝 나는 아마도 3000년쯤엔 인간들이 명상하면서 절제하는 삶을 살게 될거라고 상상한 적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믿고 싶은 신화일뿐, 실제로 인간의 그렇게 현명한 선택을 할 것 같지 않다. 쾌락(행복)을 끝없이 추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재설계하는 방법들에 거부감이 느껴진다.

<81쪽>
무한성장에 기반한 경제에는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불멸, 행복, 신성은 이러한 프로젝트로 안성맞춤이다.

<85쪽>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데 성공하면 과연 그 기술을 조현병 치료에만 쓸까? 혹시라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뇌와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몰라도 인간 심리와 사회에 대해서는 뭘 모르는 것이다.

<86쪽>
우리가 인류의 새로운 의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기술의 용도를 선택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해 그 일이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스스로 마음을 정해야 한다.

<91쪽>
우리는 역사학자들에게 조상들의 행동을 검토해 무엇이 현명한 결정이고 무엇이 피해야 할 실수였는지 알아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92쪽>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들은 대개 역사 다시 쓰기에서 시작한다.이를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역사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운명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지금과 달랐던 때도 있었다.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가 오늘날 아는 부당한 세계를 창조했을 뿐이다.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98쪽>
잔디밭에 대한 이런 간략한 역사를 읽고 나서 꿈의 집을 계획한다면, 아마 앞마당에 잔디를 까는 문제를 재고할 것이다. 물론 잔디를 까는 것은 여전히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당신은 유럽의 공작, 거대한 자본가, 심슨 부부가 물려준 문화적 짐을 벗어버리고 일본식 정원이나 완전히 새로운 어떤 창조물을 상상할 자유도 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 과거에서 해방되기 위해! 또 다른 선택지를 얻기 위해!

<103쪽>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본래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미래는 이럴 것이다는 얘기에, ‘아 그 전에 죽을래요~’ 라고 말하는 사람=나 , 변화 앞에서 늘 적응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원래 두려운거야 원래 그런거야 받아들이고 그럭저럭 잘 살고 싶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뻔한 말도 다시 되새김질 해봤다.



제1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2.인류세

<122쪽>
감정은 모든 포유류의 생존과 번식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알고리즘이다. … 알고리즘은 이 책의 이어지는 장들에서 다시 등장할 핵심개념일 뿐 아니라 21세기를 지배할 개념이므로, 알고리즘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알고리즘은 계산을 하고 문제를 풀고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일군의 방법론적 단계들이다.

<124쪽>
인간을 제어하는 알고리즘은 감각, 감정, 생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125쪽>
알고리즘은 자연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품질관리를 받는다. 따라서 확률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동물들만 자손을 남긴다. … 이런 감각, 감정, 욕망의 폭풍을 경험하는데, 이것은 단지 계산과정일 뿐이다. 계산의 결과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 동물들도 감각, 감정, 욕망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지만, 인본주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감정 작동이 우선시 된다.
📝인본주의 필터를 살짝만 벗고 보면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한 행동이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인간도 생존을 위해 어쩔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인본주의 필터를 꽉 잡아 다시 쓴다.
📝언젠가는 인본주의 세계관도 무너질 것이고 인간의 고통따위는 신경 안 쓰는 자들의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거란 하나의 시나리오도 검토해 볼 만하다.

<131쪽>
그들은[농부] 농업혁명 직후 우후죽순 생겨나 퍼져나간 새로운 유신록적 종교의 미명 아래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유신론적 종교들은 우주가 생명체들의 의회가 아니라, 일군의 위대한 신들 또는 유일신 ‘God’이 통치하는 신권체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이 개념을 농업과 연관 짓지 않지만, 적어도 처음에는 유신론적 종교도 농업사업이었다.

<133쪽>
우리는 유신론적 종교들이 위대한 신들을 신성시한 사실을 알고 그 종교들이 인간도 신성시했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 그전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수천 개의 배역 가운데 한 배역에 불과했으나, 새로운 유신론의 무대에서 사피엔스는 그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었다.

<140쪽>
그런데 인류는 과학혁명을 통해 신도 침묵시켰다. 세계는 1인극으로 바뀌었다. 인류는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서 혼자 말하고, 아무와도 협상하지 않고, 어떤 의무도 없는 막강한 권력을 획득했다. 물리, 화학, 생물의 무언의 법칙들을 해독한 인류는 지금 이 법칙들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

<141쪽>
그로[뉴턴] 인해 시작된 과학혁명은 신을 객석으로 밀어냈다.

 
3. 인간의 광휘
<147~148쪽>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오직 15퍼센트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신의 개입 없이 자연선택만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32퍼센트의 미국인은 인간이 초기 생명 형태부터 수 백만 년에 걸쳐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신이 이 쇼 전체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46페선트의 미국인은 성경에 적힌 그대로 신이 지난 1만 년 동안의 어느 시점에 지금의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3년간 대학을 다녀도 이러한 견해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10년전 조사결과,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설마 우리나라도 이럴까? 진화론을 정설로 믿지 않는 삶도 가능하다니!

<149쪽>
당신이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영혼은 없다는 이야기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독실한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세속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인간은, 비록 분명한 종교적 교의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일생 동안 변하지 않고 자신이 죽어도 그대로인 영원한 개인적 본질을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171쪽>
오늘날 과학적 정설에 따르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활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실제’세계와 구별이 불가능한 완전한 가상세계를 위조하는 것이 이론상으로 가능하다..즉, 실제세계는 하나뿐인 반면 가상세계의 수는 무한하므로, 당신이 하나밖에 없는 실제세계에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187쪽>
우리가 세계를 정복한 주요 요인은 여럿이 소통하는 능력이었다.

<195쪽>
루마니아 공산당원과 이집트 장군들이.. 독재자나 군중보다 더 똑똑하거나 손놀림이 더 민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강점은 유연한 협력에 있었다.
📝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에 그 뒤에 권력을 잡은 것은 대중이 아니라 온건한 공산주의자나 군인들이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너무 씁쓸하다. 이런 장면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는 사실도 슬프다.

<207쪽>
많은 사람이 공동의 이야기망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난다. … 왜 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할까? 그들의 친구와 이웃들도 같은 견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자기 영속적인 고리를 만든다. …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215쪽>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이 경계가 흐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이라는 허구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쓸 것이고,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기후를 재설계 할 것이고, 산과 강 같은 지리적 공간이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미래엔 역사를 생화학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거라는 주장이 흥미롭다.
 



제2부 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
4. 스토리텔러

<218쪽>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프랑스 공화국, 애플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그런 막강한 힘을 얻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사실 허구의 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225쪽>
문맹사회 사람들은 모든 계산과 결정을 머릿속으로 한다. 하지만 문자사회 사람들은 네트워크로 조직되어 있어서, 각 개인들은 거대한 알고리즘의 한 단계일 뿐이며 알고리즘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바로 이것이 관료제의 본질이다.

<233쪽>
관료들은 권력을 축적하면서 실수에 무뎌진다. 그들은 실제에 맞춰 이야기를 바꾸는 대신 이야기에 맞춰 실제를 바꾼다.
📝이야기(문서기록)에 실제를 맞춘 사례들. 아프리카에 가본적 없는 유럽인들이 그은 아프리카의 국경선, 현대 교육제도, 성경

<241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이런 유아적 망상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죽는 날까지 이런 망상을 붙들고 산다. 부모가 자기 때문에 싸우다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일신론자는 페르시아인들이 자기 때문에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운다고 확신한다.

<245쪽>
인간의 협력 네트워크를 평가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떤 잣대와 세계관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를 평가할 때 생산, 영양, 사회조화 중 어떤 측면을 볼 것인가?… 역사에는 단 하나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수천 개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나머지 내러티브들을 침묵시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246쪽>
그러므로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를 검토할 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제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어떤 실체가 실제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보면 된다.

<247쪽>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성경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유발하라리, 무신론자이자 동성애자로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살까 궁금하고 걱정도 해봤다. 오늘 분량 마지막 페이지의 실체의 실제는 고통의 감각으로 알수 있다는 얘기에 감정이 확 얹어졌다. 내가 무언가를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면, 이것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생각해봤다. 한편, 내가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가 믿는 허구(이야기)는 아닌지도 의심해봐야겠다고도 생각했다.
 

5. 뜻밖의 한  쌍

<250쪽>
컴퓨터와 생명공학 덕분에 허구와 실제의 차이가 모호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허구에 맞게 실제를 바꿀 것이다.

<250쪽>
근대 과학은 종교와 어떤 관계일까? 그 동안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온갖 대담을 골백번도 넘게 했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는 500년 동안 부부상담을 받고도 여전히 서로를 잘 모르는 남편과 아내 같다.

<256쪽>
종교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대규모 협력을 조직하는 도구라고 말하면, 종교를 영성으로 가는 최고의 길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종교와 영성 사이의 간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다. 종교가 계약인 반면, 영성은 여행이다. 종교는 세계를 빈틈없이 설명하고, 우리에게 예정된 목표와 함께 명료한 계약을 제시한다… 영적 여행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 여행은 사람들을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신비의 길로 데려간다. 이런 탐색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선인가?‘ 같은 커다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257쪽>
왜 이러한 여행을 ’영적‘이라고 부를까? 그것은 한쪽은 선하고 한쪽은 악한 두 신의 존재를 믿는 고대 이원론적 종교의 유산이다.

<258쪽>
이원론은 사람들에게 이런 물질의 족쇄를 끊고 영의 세계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므로.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어떤 물질적 유혹과도 거래하면 안 된다. 일상세계의 관습과 계약을 의심하고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용감하게 떠나는 모든 여행을 우리가 ’영적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이원론의 유산 때문이다.

📝내가 소비와 무소유(추구하는 방향)사이에서 갈팡질팡 방황하는 이유도 고대 이원론의 영향인가? 물질문명에 자주 회의를 느끼고 세상과 단절된 원시적 삶을 꿈꾸는 성향도?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종교활동을 영적으로 생각할 것 같은데, 종교의 역할이 사회질서 유지에 있고 영성이 종교에 위협이 된다(종교개혁처럼)는 주장에 설득되었다.

<259쪽>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영적 여행이 언제나 비극인 것은 사회 전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합한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협력을 도모하려면 질문만이 아니라 확실한 대답이 필요하고, 자가당착에 빠진 종교 구조를 성토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를 만든다.
📝영적여행은 그 사람에게만 적합, 사회는 결국 기존 종교를 다른 종교제도로 바꿀뿐. 카톨릭이 개신교로 나눠지듯, 다른 의식과 구조를 가진 종교가 다양하게 탄생됨

<261쪽>
과학이 잘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만이 이런 질문들에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273쪽>
따라서 설령 과학이 윤리적 논쟁에 기여하는 몫이 생각보다 크다해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 어떤 종교의 인도하는 손 없이 대규모 사회질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종교적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는 과학사를 이해할 수 없다. 과학자들은 잘 생각해보지 않는 사실이지만, 과학혁명 그 자체가 역사상 가장 교조적이고 불관용적이고 종교적인 사회 중 한 곳이서 시작되었다.
📝과학혁명은 종교적 관용이 전혀 없던 런던과 파리에서 시작되었다고..

<275쪽>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 따라서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이 사이의 계약 과정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동설을 부정한 과거 종교재판이나 타협이 불가능한 창조론과 진화론을 떠올리게 된다. 당연히 둘은 상극이라고 생각해왔다. 책을 읽으며 다른 관점도 알게 되었다.(둘이 사실은 질서와 힘을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이 장의 제목처럼 뜻밖의 한쌍)


6. 근대의 계약

<277쪽>
근대성은 일종의 계약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태어나는 날 이 계약에 서명하고, 죽는 날까지 이 계약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사실 근대는 놀랍도록 간단한 계약이다.  계약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즉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280쪽>
근대라는 계약은 이렇듯 인간에게 굉장한 유혹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위협이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전능함을 거머쥘 수 있지만, 발밑에는 완전한 무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실질적인 견지에서 보면, 근대 이후의 삶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쉼 없이 조사하고 발명하고 발견하고 성장한다. 동시에 과거의 그 어떤 문화보다 큰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린다.

<286쪽>
경제가 성장하지 않아 파이가 계속 같은 크기로 머문다면, 부자들에게서 빼앗아야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줄 수 있다… 어려운 선택, 반감, 폭력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파이를 더 키울 필요가 있다.

<287쪽>
모두 경제성장이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열쇠라고 믿는다.

<301쪽>
지금껏 많은 것을 이루었음에도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 상사, 담보대출, 정부, 교육제도를 탓한다. 하지만 그들 탓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난 날 서명한 근대 계약이 원인이다.

<303쪽>
그 결과 생겨난 불안을 상당 부분 달래준 것이 자유시장 자본주의였다. 이 이데올로기가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사상가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말을 반복한다.  “걱정마. 모든 것이 잘될 거야. 경제가 성장하는 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보살펴줄 거야.”

📝나는 무교도인 줄 알았더니, 내가 믿는 종교는 바로 자본주의 성장교였고, 이제 좀 회의가 들어서 환경보존 생태주의교로 전도되는 상황인 것 같다.
📝자본주의 성장과 그에 따른 환경 윤리의 문제는 마치 사회책을 읽는 기분이네 생각하려는데, 이 책은 그렇게 평범하지가 않다. 근대성은 이런거야!, 너는 태어나면서 너도 모르게 계약했다! 그 대신 힘을 얻었지! 그리고 그 댓가를 치뤄야할텐데, 아직 그 지경까지 가진 않았어 그 이유는 다음장에서 말해줄게! 라는 얘기들이 정신없으면서도 흥미롭다.
 
7.인본주의 혁명

<306~307쪽>
역사에서 예언자들과 철학자들은 인간이 장대한 우주적 계획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모든 법과 질서가 무너질 거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의 법과 질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는 신과 신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계획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이다. 신을 두려워하는 시리아는 세속적인 네덜란드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곳이다.
📝종교가 사회질서유지에 도움이 되던 시절도 이제 끝났다?
 
<307쪽>
과거에는 장대한 우주적 계획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인본주의는 역할을 뒤집어 인간의 경험이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한다. 인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 경험에서 인생의 의미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의미를 끌어내야 한다. 무의미한 세계를 위해 의미를 창조해라 이것이 인본주의가 우리에게 내린 제1계명이다.
  
<331쪽>
이렇듯 인본주의는 삶을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무지에서 계몽으로 가는 점진적인 내적 변화 과정으로 본다.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이다.
 
📝  인본주의의 종교적 관점을 인식하고 보니, 이제 내가 믿는 종교는 인본주의가 된다. 요즘 출판되는 모든 자기계발서와 에세이의 일맥상통하는 주제는 '더 많은 도전과 경험으로 나만의 의미찾기'이다. 내가 아이들 학교에 제출할 체험학습 계획서에 많이 쓰는 문장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힌다' 도 있다.
 
<332쪽>
행동보다 느낌과 경험에 주목하는 인본주의적 관점은 예술을 탈바꿈시켰다. 워즈워스 도스토옙스키, 디킨스, 졸라는 용감한 기사와 그들이 영웅적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신 평범한 노동자와 주부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기술했다. 

<342쪽>
인본주의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1)자유주의(정통파) : 인간은 유일무이한 개인, 개인이 자유를 누릴 수록 세계는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2)사회주의적 인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3)진화론적 인본주의

<344쪽>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와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경험이 개인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개인이 존재하고, 그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느끼고 서로 상충하는 욕망을 품는다… 각기 다른 경험들 사이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독일 난민 수용문제가 예시로 나온다. 난민을 외면하면 냉정하다고 비난, 수용하면 감상주의라고 공격함, 이런 모순이 자유주의자들의 영원한 숙제이다.

<346쪽>
따라서 자유주의는 많은 경우 오래된 집단 정체성 및 동족의식과 융합해 근대 민족주의를 형성했다.

<347쪽>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동맹은 모든 난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새로운 난제를 숱하게 일으킨다.

<348쪽>
자유주의가 시선을 내부로 돌려 내 독자성과 내 나라의 독자성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는 나와 내 감정에 집착하는 것을 멈추고 타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내 행동이 그들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한다.

<350쪽>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충돌하는 인간 경험이 문제에 대해 다른 해법을 갖고 있다. 다윈주의 진화론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는 갈등은 한탄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칠 일이라고 주장한다.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한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인간의 경험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최적자가 다른 모든 이를 누른다.

<355쪽>
자유주의가 민족주의의 온간한 버전과 융합해 개별 인간 공동체의 독특한 경험들을 보호한 반면, 히틀러 같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은 특정 민족을 인류 진보의 엔진으로 간주했고, 그런 민족들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때려눕히는 것을 넘어 절멸시켜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었다….. 나치즘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특정 인종차별주의 이론들과 초강력 민족주의 감정이 결합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19세기 민족주의와 히틀러(진화론적 인본주의자)를 같은 부류로만 알고 있었다. 둘을 구별짓는 특징이라면, 히틀러가 한발 더 멀리 갔다는 것

<361쪽>
진화론적 인본주의자들에 따르면, 모든 인간 경험이 똑같이 가치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둔하거나 겁쟁이다. 이런 저속함과 소심함은 결국 인류의 쇠퇴와 멸종을 부를 수밖에 없는데, 문화 상대주의나 사회적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364쪽>
나치즘을 무찌른 공은 무엇보다 공산주의에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리고 공산주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그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다.

<367쪽>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 자유주의자들은 “나를 공격하면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 무시무시한 방패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마지막 요새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고..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기어나와 전열을 가다듬고 세계를 정복했다.

📝2차세계대전 후 승자는 자유주의로 보였지만, 사실은 사회주의가 더 우세했다. 68혁명등 전 지구적으로 폭력사태가 잇따랐다. 자유주의 진영(나토)을 구원한 것은 핵무기의 개발이였다. 이 방패덕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버틸수 있었다.

<378쪽>
21세기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와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클 것이다.

<379쪽>
이슬람 과격주의는 사회주의보다 훨씬 더 나쁜 처지이다. 이들은 아직 산업혁명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이 유전공학과 인공지능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물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그밖에 다른 전통 종교들은 아직까지 이 세계의 주역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된 역할은 반작용이다.

<380쪽>
20세기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전통 종교들이 이뤄낸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매우 어려운 질문인데, 고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인본주의의 세가지 갈래 자유주의, 사회주의적 인본주의, 진화론적 인본주의를 이해하느라 숨가쁘게 읽었다. 이해는 했지만 설명하라고 하면 막막하다.
📝극단주의 종교인을 막연히 두려워했다. 개인 경험으로 신념의 극대화를 이룬 히틀러처럼, 인간의 믿음만큼 무서운게 없어보였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따르면, 시간이 더 오래 흐를수록 창조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서는 슈퍼마켓이 승자이듯이 같은 원리로 21세기에 종교는 힘을 잃어갈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제3부 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

8.실험실의 시한폭탄

<389쪽>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결정론과 무작위성이 케이크를 모두 나눠갖고, ‘자유’에는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자유’라는 신성한 단어는 알고 보니 ‘영혼’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밝히고 말고 할 것도 없은, 알맹이 없는 용어였다. 자유의지는 앞으로 우리 인간이 지어낸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할 것이다.

<389쪽>
자유를 관 속에 넣고 못을 박은 것은 진화론이다.

<391쪽>
나는 내 욕망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욕망을 느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393쪽>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단순한 철학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약물, 유전공학, 직접적인 뇌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394쪽>
호모 사피엔스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들은 인간 역시 쥐처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 우울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98쪽>
그런 조작이 일상화되면 고객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우리가 구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제품이 될 것이다.

📝운전공포증을 덜어주는 헬멧(경두개자극기)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근데 이런식이라면, 원하는 걸 모두 우리 뇌의 자극을 통해 이룰 수 있다면?? 그런게 정말 가능할까??

<399~400쪽>
과학은 자유주의의 자유의지에 때한 믿음뿐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믿음도 약화시킨다.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 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생명과학은 이런 자유주의 이야기가 완전히 신화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좌우 대뇌반구의 연구결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내부엔 단일한 자아가 없고 분열되는 여러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고.. 대뇌반구 연결이 끊긴 소년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때, 좌뇌는 화가가 되고 싶어하고, 우뇌는 자동차 경주라는 대답함.

<403쪽>
사람들이 어떻게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지 알고 싶어 한 행동경제학자들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실험들은 이런 결정들을 내리는 단일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 결정들은 서로 충돌하는 내적 실체들 사이의 줄다리기 끝에 나온 것이다.

<405쪽>
경험하는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참조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야기를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매우 다른 실체인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경험 전체의 가치는 중요한 순간과 결말의 평균으로 결정된다.

<407쪽>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의 합계를 내지 않고 경험의 평균을 낸다.

<410쪽>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이야기하는 자아와 동일시한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경험의 세찬 흐름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경험하는 자아가 겪은 무질서한 인생을 가지고 논리적이고 일관된 이야기를 자아내는 내부 시스템과 우리를 동일시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불변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 것이다. 이 느낌은 내가 나눌 수 없는 개인이며, 우주 전체에 의미를 제공하는 분명하고 일관된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미심쩍은 자유주의를 야기한다.

<415쪽>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운 것은 그것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417쪽>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도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418쪽>
하지만 생명과학은, 개인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생화학적 알고리즘들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자유주의를 뿌리째 뒤흔든다.

<419쪽>
세 번째 천년의 초입에 자유주의가 직면한 위협은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들이다. 머지않아 우리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엄청나게 유용한 장치들, 도구들, 구조들의 홍수에 직면할 것이다.

📝자유의지와 단일 자아개념이 진화론과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모두 허구임이 밝혀졌다지만, 리저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거도 이 자유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평범한 인간인 나는 오죽할까. 내가 만들어 철석같이 믿고 있는 나의 이야기적 자아를 포기한다면 무엇이 남겨질지 상상이 안된다. 내가 매일 읽고 정리하는 이 시간, 여기에 부여한 하루 루틴의 의미(열심히 사는 나)가 다 허구이자 망상이라고 한다면 너무 허무해서 살수 없을 것 같다.

9. 중대한 분리

<421쪽>
자유주의가 성공한 것은 모든 인간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당했기 때문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 개인들이 쓸모가 있었다.

<435쪽>
21세기 경제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그 모든 잉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높은 지능의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생긴다면, 의식을 가진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442쪽>
알고리즘이 인간을 직업시장에서 몰아내면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손에 부와 권력이 집중될 것이고, 전례없는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할 것이다. 아니면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446쪽>
컴퓨터 알고리즘이 2033년까지 고고학자를 내쫓을 확률은 단 0.7퍼센트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자라는 직업은 매우 정교한 유형의 패턴을 인식해야 하고 수익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이나 정부가 향후 20년 내에 고고학을 자동화하기 위해 투자할 확률은 거의 없다.

<447쪽>
결국 가상세계를 설계하는 일도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잘할 테니까. 관건은 단순히 새 직업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고리즘보다 잘하는 새 직업을 창조하는 것이다.

<455쪽>
더 깊은 수준에서 보면, 유전학 기술들이 일상으로 파고들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유전자를 점점 잘 알게 될수록 단일한 자아의 경계가 더 흐려질 것이고… 어려운 딜레마나 결정에 직면할 때 내면의 목소리를 찾는 대신 내면의 유전자 의회에 자문을 구할 것이다.

<477쪽>
20세기 의학의 목표는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건강한 사람의 성능을 높이는 쪽(업그레이드)으로 가고 있다.

<478쪽>
하지만 대중의 시대는 끝나고, 더불어 대중의학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인간 병사와 노동자들이 알고리즘에 밀려나면, 적어도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쓸모없는 가난뱅이 대중에게 더 나은 건강, 아니, 표준적인 건강조차 제공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표준을 능가하는 소수의 초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넥서스를 먼저 읽고 나서인지, 충격이 좀 덜했다. 21세기의 아이들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감이 안온다.

10.의식의 바다

<481쪽>
새로운 종교는 실험실에서 탄생할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소는 이슬람 국가나 성경 벨트가 아니라 실리콘밸리이다.

<482쪽>
이런 신흥 기술종교들을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술인본주의와 데이터 종교(데이터교)이다.

<482쪽>
지능이 의식과 분리되고 있고, 비의식적 지능이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인간이 이 게임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다면 인간은 마음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483쪽>
기술 인본주의는 인간의 마음을 업그레이드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과 의식 상태에 접근하려고 한다.

<497쪽>
우리는 몸과 뇌를 업그레이드하는데는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 할 것이다. 시스템은 다운그레이드된 사람들을 선호할텐데…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성가신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공감을 전혀 못하는 극단적 T성향의 사람이 설국열차의 1등칸을 차지하고 하등의 칸을 개미군단화 시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미 실리콘밸리 엘리트가 이끄는 세상이 반쯤 도래했지않나? 싶어졌다.

<499쪽>
현대 정신의학에 따르면, 많은 ‘내적 목소리들’과 ‘진짜 소망들’은 단지 생화확적 불균형과 신경질환의 산물이다.

11.데이터교

<515쪽>
현재 기술은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의회도 독재자들도 미처 다 처리할 수 없는 데이터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따라서 지금의 정치인들은 1세기 전의 정치인들보다 생각의 규모가 훨씬 작다. 그 결과 21세기 초에 정치는 장대한 비전을 잃었다. 정부는 단순히 행정부가 되었다. 정부는 나라를 운영할 뿐 이끌지 못한다. 교사들의 급여가 제때 지급되고 하수도가 넘치지 않게 할 뿐, 20년 뒤 나라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532쪽>
자동차가 마차를 대체했을 때, 우리는 말을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퇴역시켰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도 똑같은 일을 당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534쪽>
로크, 흄, 볼테르 시대에 인본주의자들은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데이터교가 인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똑같이 돌려줄 차례이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542쪽>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대개 현시점의 이데올로기와 사회 시스템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현시점에 우리가 처한 조건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 얽매임엥서 벗어나 다르게 행동하고, 미래에 대해 훨씬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543쪽>
지평을 넓힐 때의 역효과는 전부다 더 혼란스럽고 무력해지는 것이다.
 
<543쪽>
고대에는 힘이 있다는 것은 곧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날 힘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혼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

📝우리가 마주할 미래 시나리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 섬뜩하고 혼란스럽다. 이런걸 알게 되었지만 책만 덮으면 또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고 있다.
📝막연히 인간을 위한 기술이 인간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인간을 인도하겠거니, 위대한 과학자나 개발자가 해결하겠지 하는 바람은 이제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