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삶_ 이창래
내가 구독하는 블로거가 소개 한 책이였는데, 소개글에 끌려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예스24 북클럽에 "영원한 이방인"과 "척 하는 삶"까지 있어서 두권을 연이어 보게 되었다.
척하는 삶이 더 여운을 남겨서 뭐라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도서관에 가서 다른 작품도 대출하려고 했는데, "가족"은 너무 지저분해보여서 그냥 두고왔고,
종이책만 보는 남편을 위해서 "척하는 삶"만 빌려왔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써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보는 노인이 주인공인 소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위안부를 얘기하는 소설이라는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읽었는데
내용 중간에 갑자기 나오는 전혀 예상치 못한 참혹한 전시상황 묘사에서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주로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불끄고 전자책리더기로 봐서 몇일밤은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런 장면을 한참 힘들게 떨면서 읽다가 책을 덮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경험과 사건이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서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하는 단순한 주제를 담은 소설이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이였는데,
글로 정리하려니 매우 어렵다. 그냥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불편했던 전시상황 묘사들은 피하고 싶은 마음에 빨리 지나쳐버려서 크게 기억에 남겨두지 못했다.
부모가 되고 난 이후 나는 자식보다 부모의 입장에 더 공감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타가 입양한 딸 서니의 반항이 이해가지 않았고 화가 났다. 끝에 가서야, 원하지도 않은 것을
얻게 된 아이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돈이든 부모든 원한 적도 없는데, 그것이 좋은거니까,
물리적인 풍요니까 감사해하며 순한 아이로 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거니까.
집의 화재로 죽을 고비를 넘긴 하타가 이제 딸과 재회를 결심하고 10년만에 딸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멀리 숨어서 딸과 손자의 짧은 이별장면(데이케어 센터)을
지켜보는 하타의 시선에서 묘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서니는 두 손으로 아이의 귀와 뺨을 감싸 쥐고 떠나기 전 작별 인사로 잠깐 손가락을 흔든다. 아이는 숫기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서니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나 두 팔을 벌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간다. 그렇게 가볍지만 고집스럽게 그녀의 옆구리에 몸을 박는다. 서니는 손으로 거칠게 아이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더니, 아이를 밀어 달려가게 한다."
"쇼핑몰 한가운데 꼼짝 않고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잠시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어린 시절 그 애의 길고 메마른 응시의 눈길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부엌 탁자 건너편에서, 또는 수영자의 짙은 색 물 건너에서, 또는 주차 미터기에 기대 향신료 냄새가 나는 담배를 피우던 가게 앞 보도에서 치켜뜨고 바라보던 냉혹하고 매정한 눈길.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선이가 그저 나를 아는 표시를 한다는 것이 보일 뿐이다. 반쯤 화가나고 반쯤 슬픈 눈."
<그외 밑줄 그은 문장들 >
이 세상(또는 우리가 만든 세상)에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가장 빈약한 축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늘 영광과 찬양을 받는 것 같지만 실제로 아름다움을 가진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부분 악의와 비참뿐이다, 라고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안다.
오직 패트릭에게만 달려있다. 그 아이가 심장을 기다린다는 슬프고도 묘한 사실에 달려 있다. 물론 심장이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다. 다른 어린아이가 끔찍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뜻이다. 보존 법칙이라는 것이 에너지와 물질에만이 아니라 인간과 그들의 노력에도 적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법칙이 종종 야릇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또 잔인해질 수도 있다.
가족 문제가 너저분해지고 복잡해지는 증거들이 점점 분명하게 나타난다 해도, 자식이 늘 부모에 대해 무조건적인 존중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설사 착각이라 해도, 갓 태어난 딸을 넘겨받았을 때 메리 번스의 마음에는 그런 감정이 흘러넘쳤을 것이 틀림없었다. 토마스가 내 손을 잡아 끌 때마다 나도 그런 감정에 휩싸인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 감정이 어떻게든 순수한 것이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기를, 인간의 희망이나 경건함이나 두려움, 심지어 사랑과도 혼합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 감정이 화려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 감정은 늘 다른 것과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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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따라가면 정신없이 읽었는데, 전자책 마지막장(아마도 출판당시 띠지겠지?)
거기에 김연수 작가의 서평이 있었다. 이 서평으로 내가 내내 품었던 감정이 다 정리 된 기분이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작품을 읽었을때, 처음에는 '이게 뭐지?'라고 생각했었다. 뉴욕 시 교외의 부촌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 하타의 평온한 말년의 일상. 그러나 그 삶의 이면에는 세계 2차 대전을 경험한 이들의 선과 악이 서로 들러붙은 채 공존하고 있다. 이창래는 이 모호한 공존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그 틈새를 파고든다. 주목할 만한 것은, 언제나 그의 문체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도 정확한 그의 문체를 따라가노라면 솜씨 좋은 외과의가 칼날을 쓰는 걸 지켜보는 듯하다. 도저히 선과 악을 구분 할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소설에서도 그는 정확하게 그 경계를 가른다. 그리하여 도달하게 되는 위로도, 용서도 없는 세계, 거기가 바로 '척하는 삶'의 세계다. - 소설가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