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_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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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신간을 사놓고는 그 책은 펼치지도 않고있다. 대신 예전에 읽었던(아마도 2017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었다.
제목과 다르게 예감은 틀렸다!는 결론으로 기억되는 소설이었고 당시에 여운이 너무 많이 남아서 영화도 봤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도 분명 읽었으나, 기억이 전혀 안나는걸 보니, 특별한 줄거리가 없었나?)
영화로도 봤으니 이 책의 줄거리는 잘 기억하고 있지만, 그때 이 책을 읽고 왜 좋았는지, 맥락과 흐름이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전자책에 내가 표시해둔 6년전 하이라이트를 보며 그때의 내 감정에 다시 접속해보는 놀라운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당시에도 한번 읽고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재독했고 이번에도 마지막 문장 읽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재독했다. 처음 읽었을 땐 기억의 왜곡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읽은 지금은 노년에 맞이 한 회한에 대한 책으로 읽혔다.
학창시절 친구들인
토니(주인공), 에드리언, 베로니카
시절인연으로 끝난 줄 알았던 그들의 이야기가
40년이 흐른 뒤에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 읽는 내내 ’회한‘이란 감정에 허우적대느라
매우 힘들었다. 토니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저 감정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될까.
나라면, 나에게도 어느날 갑자기 다 잊고 살던 과거의 인연들이 나타나서 그때 너가 나에게 그렇게 해서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 라고 나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아아! 회한은 수치심보다 더 무서운 감정일거야! 짐작만 해본다.
저들의 40년 인생을 펼쳐본 독자로서 베로니카 입장에서 쓴 소설을 읽고 싶다. 베로니카가 받았을 충격, 토니에 대한 원망. 가장 큰 원인제공자인 자신의 모친에 대한 원망이 제일 컸을 것 같은데, 천륜을 끊을 수 없었겠지. 그리고 이어받은 큰 짐! 베로니카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때 그러지 말걸,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말걸, 그때 우리집에 초대하지 말걸. 하나의 선택에 대한 수많은 가정을 해보며 평생을 한숨으로 보냈을까?
어쩌면 베로니카는 모든 일의 수습자로서 묵묵히 잘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유언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그 옛날의 원망의 감정을 되살려냈을까?
이쯤에서 나의 감정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베로니카 모친이 제일 문제였네! 라고 결론을 내고 싶어진다. 도대체 어쩌다가? 토니가 에드리언에게 쓴 편지의 한 문장 “베로니카 모친과 상담해봐라” 이 조언뿐인데, 묘사가 생략되어 그들의 관계의 실체는 알수가 없지만, 모친의 유언장에 “마지막 몇 달동안 애드리언은 행복했다고 생각해..” 이걸로 상상해보면, 베로니카가 토니를 원망할 일 만은 아니겠다.
이런 나의 상상이 에드리언이 언급한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로 빚어지는 확신‘이겠지!
이제 그만 책에서 빠져나와야겠다.
밑줄 그은 문장정리
(전자책이므로 페이지 표시 없음)
-1부-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 그리고 이제까지 소설과 무관하면서도 그에 준하는 삶을 산 사람은-롭슨을 제외하면-에드리언이 유일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2부-
나는 요새도 역사책을 많이 읽는다…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내가 지금 느끼는 건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아니었다. 천만에, 내 인생에선 상대적으로 드문데다 더욱 강렬한 종류였다. 회한의 감정. 더 복잡하고, 온통 엉겨붙어 버린 원시적 감정이다. 그런 감정의 특징은 속수무책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 개선의 여지조차 없는 감정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언제나 흐리멍덩했고, 인생이 내게 던져주는 얼마 되지도 않는 교훈에 대해 크게 깨달을 깜냥도 못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 알게 된 친구들을 잃었다. 아내의 사랑을 잃었다. 즐겼던 야망을 저버렸다. 인생이 너무 성가시지 않기를 바랐고 성공을 거두었다.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평균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평균치가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생각해봐도 마음은 결코 편해지지 않았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나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배우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뇌는 고정 배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사는 감소의 문제요, 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뇌가, 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그래서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 테고, 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 일이 요새 내게 일어나고 있으니 경악할 노릇이다.
내 생각, 혹은 이론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세월이 흐르면서 이거에 뭔가,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똑같은 사실, 똑같은 감정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몇 년이고 계속되나, 그러나 에드리언이나 베로니카라는 버튼을 누르게 되고, 테이프가 돌아가고, 흔한 이양기가 흘러나온다. 그런 사건들이 온갖 감정-분노, 억울한 감정, 안도감-을 재확인해주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달리 접근할 만한 것은 전혀 없는 듯 보인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보강 증거가 되어줄 만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설령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해도. 그런데 나중에 가서라도 오래전 사건들과 사람들에저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쓴 그 흉악한 편지를 읽고서 나는 회한의 감정을 느꼈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 우리는 기나긴 휴지기를 부여받게 된다. 질문을 던질 시간적 여유를. 그 밖에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