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책 세월_김형경

여름 날 2024. 8. 11. 21:42


힘들었던 삼십대를 통과하게 해준 책으로
김형경 작가의 심리에세이 시리즈 5권이 있다.
지금도 가끔 그 책들을 펼쳐보면서 힘을 얻을 때가 많다.

작가님의 소설은 성에,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 등을 읽었고, 세월을 읽어봐야지 했지만, 도서관엔 있는 구버전 세월이 너무 낡아서 도저히 집으로 가지고 가서 볼 마음이 안들었다. 그러다가 그나마 좀 최근 버전을 빌리게 되어매우 늦었지만 이제라도 세월을 읽었다.

나는 나의 고통을 이제서야 바라볼 자세가 되었는데
이 분은 이걸 30살 중반에 다 해결했구나!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이후 출판 모든 에세이시리즈가 작가의 인생 사건들과 연결되어 더욱 잘 이해가 되었다.


요즘은 왜 책을 안쓰시는 건지 안부가 너무 궁금했다.
이제 문학이란 나무에 열리는 열매(책)인 책을 쓰지 않아도 좋은 삶을 찾으신건가 생각해봤다.


읽는 내내 깊이 빠져들어 감정 소화하기 힘들었고
100프로 실화라고 믿으면서 실제 인물들을 찾아보느라
나의 호기심 충족하느라 또 애썼고
그렇지만 이제라도 읽어서 좋았다.
밑줄그은 문장 몇가지만 정리 해본다.

1권
<21쪽>
억울하다는 것은… 그러므로 억울하다는 것은, 그 일들을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거나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이 들 때면 어떤 무거운 쇳덩이에 가슴이 눌린다. 그러면 그 여자는 몸이 납작해져서 지층 깊은 곳까지 단숨에 내려간다. 백악기나 쥐라기의 지층까지, 인류가 처음 죄를 지었다고 말해지는 그 동산까지. 한번 내려가면 올라오기가 힘들다. 억을한 점은 바로 그거다. 왜 쓸데없이 땅밑을 오르내려야 하는가. 불필요한 감정과 힘의 소모가 억울하다.

<84쪽>
아이는 햇빛 속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햇빛 속에 눈을 감고 있으면 눈앞으로 소금쟁이나 물방개들이 뱅글뱅글 강물 위에 동심원을 그리며 돌아다닌다.

<219쪽>
그 여자가 지금도 일관되게 나이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어느 만큼 살기 전에는 어는 나이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265쪽>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장 큰 약은 시간이라고, 나이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그걸 비겁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한다. 가장 좋은 약은 시간이라는 것을.

<398쪽>
물론, 지금은 안다. 한 사람의 내부에 열 개, 스무 개는 되는 얼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장인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남편의 얼굴, 선배의 얼굴, 후배의 얼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얼굴은 더욱 다면체가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면체이고, 어느 방향에서 그를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은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2권
<161쪽>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맹자 어머니가 바보겠는가. 무덤에서 범한 오류를 시장 거리에서 되풀이할 만큼.  만약 그 여자가 맹모였다고 해도 무덤 근처가 교육적 환경이 나쁘다고 판단햇으면 곧바로 학교 근처로 이사했을 것이다. 그 여자는 맹모삼천지교의 일화를 다르게 해석한다. 맹자 어머니 무덤 근처에 살며 먼저 자식에게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해 가르친다. 인간 존재의 유한성,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되며, 그렇게 때문에 삶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다음으로 시장 거리에서 현실적인 삶의 법칙들을 가르친다. 경쟁과 거래와 생존을 위한 악다구니, 그런 일상적 삶에 대해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알고 나면 시장의 원리를 받아들일 때도 탐욕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야 학교에서 학문을 가르친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일상을 지배하는 생존의 법칙들을 이해하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학문을 할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519쪽>
그 여자를 키운 것은 팔 할의 친구나 이 할의 문학과 음악이 아니라 세월이었다고. 바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파도처럼, 그 여자를 향해 몰아쳐오던 그 세월이다. 파도가 바위를 쪼아대듯, 세월은 그 여자를 깎고 쪼아서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파도가 바위에 오묘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새겨 넣듯, 세월은 그 여자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결을 형성해주었을 것이다. 그래, 그 여자를 키운 것은 십 할이 세월이다. 그러므로, 그 여자가 인생에서 배운 단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세월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어느 나이에 이르기 전에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유의 김치가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세월이다. 시간이 퇴적충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이다. 그러므로 세월 앞에서는 겸허해야 한다.

<524쪽>
생각해보면, 그여자가 이 글을 쓴 것은 하나의 나무를 심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슨 뜻일까.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 여자가 계속 소설을 쓴다면, 그 소설은 모두 이 나무에  열리는 열매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