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양육가설

여름 날 2024. 7. 8. 11:47

7월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은 양육가설이었다.
5월 우리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다가, 언급된 이 책이 우연히 7월에 선정되어서
나도 반가운 마음에 읽었다.
인생책이라는 말을 낯간지러워하는 편인데,
나에게 그런 책을 고르라면, 책 개성의 탄생이라고 말 해야겠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책을 읽기 전 후의 나는 많이 달라졌다.


<책을 읽기 전> 
몇년 전에 작가의 다른 책 ‘개성의 탄생’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그 동안 내가 읽어 온 발달심리학책들과 깊이 의지 해 온 심리상담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여러 심리학 이론들에 대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 볼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개성의 탄생을 쓴 이후 개정판으로 새로 낸 이 책 양육가설도 비슷한 감상으로 마무리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제목이 주는 도발성 때문에 마치 이 책을 읽고나면, 좋은 부모로서 올바른 양육을 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대감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이 책의 주제와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도 예상되기도 했다. 나는 양육을 학습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한다. 먹이고 입히기만 하던 시절엔 몰랐던, 공부와 입시의 세계!  저 세계만 걷어치우면 양육은 너무 쉬울 것만 같다. 
 
<책을 읽으며, 양육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나의 양육 태도를 점검하기> 
개성의 탄생에서는 인간 성격의 차별화(분화)를 이야기했다면, 이 책 양육가설에서는 사회회를 통해 서로 닮아가는 동화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저자의 표현으로는 집단사회화이론이다. 저자는 부모가 자식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다(양육가설)는 주장이 근거가 없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육의 속설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기는 흰도화지같은 상태라서 부모가 원하는대로 키울 수 있다',
'첫째랑 둘째는 성격이 다르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문제가 많다', '집에서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는 학교에서도 문제아다'  
이러한 것들은 상관관계인데 마치 인과관계인것처럼 해석한 것이 기존 발달심리학계의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책을 읽다보니 이런 연구결과들에 의해 우리에게 양육가설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았다. 특히 역기능가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그럴수도 있지만 아닐수도 있겠네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편모가정의 장녀로 자라면서 그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아빠의 부재를 드러내야하는 모든 상황이 싫었던 것 같다. 내가 저 시절 갖었던 자격지심은 ‘아빠 없는 애들이 버릇이 없네‘ 라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였는데, 저런 말들도 다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양육가설의 바탕속에 생겨난 것 아닌가 싶었다.

또한, 아이가 성장하면서 영향을 받는 것들을 본성과 환경이라고 할때, 내가 노력해서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또래집단)에 넣어주면 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운명적으로 아주 좋은 집단을 만나 좋은 영향 선순환에 빠지게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자 하는 내 욕구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 바뀌었다. 나는 지금보다 아이에게 더 투자(?)할 여력이 없다는 자각이 왔고,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내가 아이의 인생의 수 많은 변수를 통제 할 수 없을테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었다. 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돌아보면서, 어디서 자랐든 지금의 내 모습과 성격에 큰 영향이 없었을거란 확신도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아이들도 타고난 유전자를 가지고 잘(?) 살것 같았다. 내 스스로도 너무 싫어하는 나의 단점이 아이들에게 보일때 너무 속상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작고 귀엽지 않은 나의 아이들을 예쁘게 생각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나의 유전자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 모든 단점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나는 양육을 즐기고 있는가? (저자는 양육이 힘들다면,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한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다시 오지 않는 순간들인데, 내 자기계발만 하는거 아닌가 고민하는 순간들이 있다. 엄마들을 만나서 좋은 학원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그냥 그런 정보를 모른 채 살고 싶어서 자꾸 회피하고 있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놓치고 시간만 허비하는거 아닌가? 조급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육아방식이 보상과 조건화였다는걸 인식하게 되었다.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로 태어난 아이를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란걸 깨달았다. ‘우리 아이 이렇게 키워서 000 됐어요’ 식의 육아성공사례를 읽으면서 이것저것 따라한 적도 있었는데, 그건 모두 훌륭한 부모의 좋은 습관과 유전자를 물려받은 훌륭한 자식 이야기 일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채 태어나겠지! 옆집 애들 그만 쳐다보고 내 아이들의 본성에서 더 좋은 모습을 이끌어낼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젠 중학생이 되어 사춘기 또래집단과 비교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볼 일이 없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면서, 아이의 귀여운 면을 다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그냥 나를 닮은 내 자식이라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비록 가정내에서의 효과일지라도 내 진심어린 장난에 아이의 마음이 말랑해지는 틈이 보여서 기쁜 날이 늘어난다.(엄청난 정신 승리) 
그리고 나의 제안과 권유에 아이들이 "싫어"라고 대답할때 너무 속상하지만  꾹 참고 “그래 싫구나” 하며 수용할 때 좀 성숙한 엄마가 됐구나 느끼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나는 아이들의 싫어를 거절로 느끼며 매우 서운해 하거나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며 화를 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단하나의 문장만 고르라고 하면 바로 이문장이다.
 

조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자녀를 사랑하되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 양육을 즐겨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라. 긴장을 풀어라.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지는 당신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았는지를 반영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p.549>

 
<책을 덮으며>
양육가설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100퍼센트 부모입장의 독자였다. 중반부터는 자식의 입장에서 나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책을 덮을 때엔 부모도 자식도 아닌 그냥 나 자신이 되어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수전 포워드와 존 브래드쇼의 책들을 열렬히 읽었던 시기가 있었고 오랫동안 빠져들었다. 그런 책들의 사례들이 내 얘기 같았고, 그런 원인과 결과 때문에 지금 내가 힘든 것 같았다. 언제나 그 원인제공자는 나의 엄마인걸로 결론이 났다. 나는 사춘기때 해야할 반항을 서른살이 넘어 애 둘을 낳고 난 후에야 엄마에게 퍼부었다. 그리고 한동안 엄마를 미워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심리상담센터와 관련 책읽기에 시간과 노력, 돈을 쓰고 나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힘들었다. 나를 획기적으로 바꾼건 양육가설 저자의 개성의 탄생을 읽고나서부터였다.  예민한 나를 키우느라 힘들 없을 엄마가 그제서야 보였다.  내가 양육가설의 필터를 제거 하고 나서야 우리엄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존재였다는 걸 깨달았다. 죄 없는 원부모를 가해자로 몰고가게 한 심리학 분야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 이번 양육가설을 읽으면서(책의 결이 거의 비슷하다) 다시 한번 그때의 감상을 그대로 느꼈다.
 
나는 이제 아이들을 어떻게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양육에 있어서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어른이 된 아이가 힘들게 고생하면서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상상이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학벌과 직업으로 많은게 결정되는 한국사회에서 루저로 살 것 같은 공포감이 있었다.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은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용기를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 너의 인생은 너의 것' 이렇게 확실하게 선을 긋자는 소리는 아니다. 어른이 된 자녀가 부모인 나를 바라보면서 '우리 부모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군 안심할 수 있게 나의 삶을 단단하게 꾸려가야겠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아이들이 자라서 엄마탓을 하면서 나에게 따진다면, 책 두권 ‘양육가설’과 ‘개성의 탄생’을  읽고 다시 얘기하자! 라고 말 할 것 같다.
 
자녀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 추천을 받은 누군가가 책 소개만 읽고 양육은 환경이 제일 중요해! 라고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우리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해준다. 사실 부모로서 할게 거의 없다는 내용이라서 허무하지만, 곱씹을 수록 이게 맞다 싶다. 
 
이제 밑줄긋기 정리해본다. 다시 읽을 필요없이 내용 흐름에 맞춰서 요약 줄긋기를 하다보니, 양이 매우 많아졌다.

서문
<p.12>
전문가는 틀렸다. 부모의 양육은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사회화되지 않는다. 양육가설은 신화이며 이를 뒷받침하던 대부분의 연구는 가치가 없다.

1. 양육은 환경과 같은 말이 아니다

<p.49>
발달심리학이 현재와 같은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1950년대부터였다. 연구자들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보이는 공통점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아이들 간의 차이를 발견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많은 연구가 부모의 양육방식에 따른 아이들 간의 차이 쪽으로 흘러갔다.

<p.50>
프로이트 이론과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노골적인 인용은 줄어들었지만, 아이의 행동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통해 부모가 아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행동주의 학자들의 믿음과 부모가 아이를 얼마든지 망쳐버릴 수도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경우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프로이트주의자들의 믿음, 이 두가지 만큼은 여전하다.

<p.54>
아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유년기의 사회화는 대체로 부모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2.본성과 양육의 증거
<p.66 사회화 학자들의 연구 결과>
1)부모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다면 그 자녀도 부모와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자신의 삶이나 가정에 대해, 또는 개인적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부모의 자녀들은 부모와 같은 문제를 겪는다.

2)애정과 존중을 받고 자란 아이는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을 살고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저자는 사회화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근거 부족하다고 다음과 같이 반론제기

<p.67>
부모가 제공하는 유전자의 작용과 그들이 제공하는 환경의 영향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

<p72>
평균적으로 괜찮은 부모에게서 괜찮은 아이가 나오는 경향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가-유전 이외의 방식으로-아이가 어떤 인간이 될지에 영향을 미친다고 입증 해 주지는 못한다.

<p.73>
양육은 부모가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p.75>
부모가 아이들을 달리 대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3.본성, 양육, 그리고 제3의 가능성

<p.89>
한집에서 같은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자랐다는 점은 성인이 된 형제들의 성격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형제들이 공유하는 유전자로 둘 사이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 공유하는 환경적 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유사성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p.93>
가정이란 하나의 균질한 환경이 아니라, 작은 미세환경들의 집합이고 아이들은 각각 자신만의 미세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한 가정 내에 미세한 환경들이 존재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아이들은 한집에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며 가족 구성원들과도 각기 다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데도 딱히 반론을 펼 수 없다. 사람들은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을 똑같이 대해주려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4장 구분된 세계
<p.118>
우리는 여러 사회적 맥락에서 각기 다른 행동을 보이지만 또한 서로 다른 맥락 사이를 이동하면서도  일관된 기억을 지닌다. 그렇지만 우리는 특정 상황에서 배운 내용을 다른 맥락에까지 적용하려 하지는 않는다.

<p.140>
아이들은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평범한 부모를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과정의 일부다. 만일 아이의 부모가 어떤 점에서든 뭔가 특이하다면 아이들은 친구에게 자기 부모의 특이함을 감추려고 애쓴다.

<p.142>
사회적 맥락을 오가면서 유지되는 성격의 안정성은 경험하는 다양한 맥락들이 서로 얼마나 유사한가 혹은 얼마나 다른가에 부분적으로 의존한다.

<p.145>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당신의 생각은 분명히 옳지만, 부모가 아이들 곁에 없을 때도 그 영향이 지속된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는가? 부모들 앞에서는 무례하게 행동하는 아이들이 친구나 선생님과 있을 때는 얌전할지도 모른다.

<p.146>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행동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혹은 부모와 연관된 맥락 속에 있을 때 아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5.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p.159>
자녀 양육은 물리학과는 다르다. 학자들이 연구하는 내용과 그 해석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두 자녀와 부모 각각에 대해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관점들의 결과물이다. 이 관점들은 언제라도 심지어는 한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도 뒤집힐 수 있다. 유년기와 부모 노릇이란 기본적으로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중성미립자나 쿼크에 관한 이론을 검증할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p.169>
전통사회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딱히 노력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데는 두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전통사회의 아이들은 서로 싸울 일이 별로 없다… 둘째로 요즘 부모들은 첫째가 동생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p.170>
전통사회에서 부모들은 전문가의 말에도 관심이 없었고 또 자기의 양육방식이 자녀에게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염려하지도 않았다.

<p.172>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행동이 자녀의 여리고 약한 심성에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아이를 기르기는 더 쉬워질 것이다. 물론 이건 부모의 입장에서 쉽다는 의미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오십보백보다.  전통사회에서나 현대 사회에서나 사람들 모두 자녀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으며, 양쪽 모두가 다 자기들은 자연이 정해 놓은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따라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속해 있는 사회의 문화에 의해 정해진 법칙이다. 우리 문화권에서 통하는 법칙 가운데 하나는 이렇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라.

<p.173>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모들은 전문가의 충고를 찾아 읽으며 그대로 따르려고 애쓴다. 이러한 부모와 아이들이 다시 전문가들의 충고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계획된 실험에 참가한다. 이렇게 결과가 미리 정해져 있고 원인과 결과가 돌고 도는 연구들이 부모와 자녀에 관해 오늘날 우리의 문화와 시대가 받아들이는 기묘한 가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가설들은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나 다름없다.
 

6. 인간의 본성
<p.197>
다른 집단의 구성원을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혐오스러운 본성의 일부다. 아이들은 미워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 존재로 태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방인 혐오자로 태어난다.

<p.207>
부모에게서만 배운다는 것은 자녀들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쓸모 있고 혁신적인 변화를 수용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나이든 동물보다는 어린 동물이 유용하고 혁신적인 변화를 더 잘 생각해내기 때문에 연장자만이 아니라 또래에게 배우는 것이 자녀들에게는 이득이 된다.

<p.212>
아이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부모의 사랑을 받는가가 아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 곧 같은 세대에 속해 남은 삶을 함께 보내게 될 또래들과 잘 지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7장 우리 대  그들

<p.215>
당신이 인간을 잔인하거나 선하다고, 이기적이거나 희생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자기 집단 구성원에 대한 행동을 관찰하느냐 다른 집단 구성원에 대한 행동을 관찰하느냐에 좌우된다.

<p.226>
집단대조 효과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을 집단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집단들은 자동적으로 자기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되며, 그 결과 집단 간의 사소한 차이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p.229>
집단 내에서 차별화라는 과정이 발생하는 것은 인간 집단의 본성이다.

<p.234>
인간 집단의 행동은 매우 복잡하다. 우리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을 여러 다양한 집단에 속한 존재로 인식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심리학자 존 터너는 이를 자기 범주화라 부른다.

<p.236>
오늘날 우리가 습득한 인지 능력의 화려한 장식 이면에는 오랜 진화의 뿌리가 놓여 있다. 집단성이 가진 정서적 힘은, 형제자매와 부모, 자실, 남편, 아내 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곧 유일한 생존의 희망이었던 기나긴 진화의 역사로부터 온 것이다.

<p.237>
나는 유사한 사람에게 끌리는 경향이 혈연 인식이라는 먼 근원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p.240>
특정한 사회적 범주가 현저해지고 당신이 스스로를 그 범주의 일원으로 느낀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이 범주화한 집단은 당신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 영향력으로 인해 집단 구성원들 간의 유사성 및 집단 간 차이가 커져간다. 존 터너는 이를 심리적 집단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예전에 준거 집단이라 불렀던 용어다.

<p.243>
현대 가정의 사적 영역 안에서 가족은 현저한 사회적 범주가 될 수 없다. 비교할 다른 가족이 근처에 없기 때문이다.

<p.244>
나는 내 이론을 집단사회화 이론이라 이름 짓고 싶다. 하지만 이 이론은 사회화 과정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라면서 경험하는 내용을 통해 아이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바뀌어가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나는 양육가설을 대신할 이론으로 이 집단사회화 이론을 제시하고자 하며..


8.아이들 무리에서
<p.253>
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엄마와의 관계에서 학습한 것을 미래의 관계에까지 일반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신데렐라가 집 밖의 사람들도 새엄마처럼 자기를 대할것이라 생각했다면 결코 무도회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p.256>
엄마는 친구를 대신할 수 없지만 친구는 때로 엄마를 대신할 수 있다.

<p.260>
압도적 재능을 지닌, 또래 아이들과 공유할 요소를 전혀 지니지 못한 천재들은 사회적 정서적 문제를 안게 될 확률이 높다.

<p.270>
아이들은 부모를 맹목적으로 따라 하지 않으며, 매우 신중하게 모방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정상적이고 전형적으로, 즉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동일한 행동을 한다고 여겨질 때만 부모를 모방한다.

<p.274>
발달심리학자 리앤 버치는…미취학 아이들에게 싫어하는 음식을 먹이기 위해 부모가 할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모의 교육이나 설득은 아무 효과도 없고 아이들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싫어하는 음식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있다. 그 음식을 좋아하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히고,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을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p.279>
아이들은 자신을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고 그 집단의 행동과 태도, 어법, 복장 등을 받아들이면서 올바른 행동에 대한 생각을 얻는다.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대부분 자동적이고 자발적으로 밟아간다. 즉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닮기를 바란다.

<p.282>
우정(혹은 우정의 결핍)은 개인의 성격 형성에 영구적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반면, 집단에 대한 동일시와 그 집단의 거부 및 수용은 성격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p.289>
인간의 집단성이 보다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때는 유년기 중반부터다. 나는 바로 이때(초등학교 시절) 진짜 중요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영구히 사회화되며 성격에도 항구적 변화가 일어난다.

<p.290>
유년기 중반을 지나며 아이들은 같은 성별의 또래 아이들을 점점 더 닮아간다…. 같은 성별의 또래 친구에게 용납되지 않는 행동이 좀 더 용납될 만한 행동으로 바뀌면서 성격의 거칠고 모난 부분이 조금씩 다듬어진다. 새롭게 학습한 행동은 습관화되고 내면화되어 결국 공적 성격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공적 성격이란 아이들이 집 밖에 있을 때 가시화되는 성격으로 이것이 이후 어른의 성격으로 발전해나간다.

<p.290>
우리는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의지와 동화시키려는 의지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대부분의 경우 집단에 자신을 동화시키고 특수한 몇몇 부분에서 자신을 차별화하는 것이다.

<p.294>
나는 또래집단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했는지가 성격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던 아이는 낮은 자존감을 지니는 경향이 있고 내가 보기에 그 불안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평생 지속된다.

<p.298>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친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늘어난다. 하지만 아이의 타고난 특성이 확장되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영리한 아이는 학구파 아이들과 어울리는 경향이 있고, 머리가 좋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들의 영향으로 아이는 학교에서 더 성실히 공부하고 결과적으로 더 영리해질 수 있다. 그야말로 악의는 전혀 없는 악순환인 것이다.

 

9.문화의 전달

<p.304>
성격은 일부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다. 태도, 신념, 지식, 기술처럼 문화의 일부를 이루는 것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데는 유전자가 작용하지 않는다. 나는 문화가 학습되는 것이라는 마거릿 미드의 정의에 일부 동의한다. 그런데 과연 그 학습이란 어떻게 이루어지며,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인가?

<p.308>
환경적 요인들 중 무엇이 작용했는지를 가려내기 위해 사용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하지 않는 경우를 살펴보는 것뿐이데, 그것이 내가 게속해서 이민 가정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 이유다. 지역공동체의 문화와 부모의 문화가 서로 다르다면, 부모의 영향과 가족 외적인 영향을 구별할 수 있다.

<p.309>
나는 대부분의 이민자 부모들이 자녀가 다른 문화권의 구성원이 되는 모습을 보며 자부심과 후회가 교차된 복잡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p.314>
집 밖의 문화와 집 안의 문화가 서로 다를 때는 집 밖의 문화가 승리한다.

<p.322>
나의 이론은 사회화, 성격 발달, 문화의 진수라는 각기 다른 세 학문 영역을 통합한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또래집단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아이들의 행동 양식이 형성되고, 타고난 특성이 수정되고, 결국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지가 결정되는 곳은 바로 또래 아이들과 공유하는 세계다.

<p.332>
집단마다 자녀 양육에 대한 고유의 관심과 태도, 신념이 있다. 이러한 관심과 태도는 이른바 부모의 또래집단을 통해 부모들 사이에 퍼져나간다. 또래집단을 갖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부모 역시 또래집단을 형성하며, 어른의 또래집단에도 나름의 규범과 처벌이 있다.

<p.349>
하지만 결국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정 환경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또래집단에 속한 아이들이 공유하는 환경이며 그들이 창조한 문화다.



10.성별이 결정한다.

<p.361>
…자기도 결국 어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알려면 누군가에게서 들었거나 아이 스스로 추론 과정을 거쳐야한다. 어른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아이에게는 당연하지도 않고 일어날 수 이쓴 일도 아니다. 간신히 믿어질까 말까 할 뿐이다.

<p.366>
이러한 상호 회피적인 관계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라는 대조적인 두 집단의 범주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유년기를 지나는 동안에 성별에 따른 구분은 계속해서 강화된다. 이 구분은 사춘기 직전에 가장 선명해지며 그 뒤로는 서서히 희미해진다.

<p.381>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는 지위와 기분이다.

<p.383>
하지만 성별에 의한 사회화가 인간의 다양성을 만드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집단의 가치관을 수용하거나 부정하게 하는 심리적 압박, 서로의 가치관을 차별화하는 집단대조 효과를 통해 우리 인간은 다양한 특성을 갖게 된다.

11. 학교와 아이들

<p.387>
우등생과 열등생 집단 간의 대조효과는 결과적으로 열등생이 점점 더 멍청해지게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를 똑똑하게 만드는 행동을 멀리하는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p.388>
학교에서 아이들 집단은 대체로 학업 능력 또는 의욕에 따라 묶인다.

<p.400>
우리에게 진짜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이름은 타인이 아닌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다른 사람이 덧씌운 것보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스테레오타입은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

<p.403>
나는 개인 프로그램이 성과를 거두려면 아이가 속한 집단의 행동과 태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본다.

<p.413>
집단이 어떻게 나뉠지는 우연한 사건, 개개인의 성격,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사에게 달려 있다.

<p.414>
이제 우리는 빈민지역 아이들을 많이 선발하여 사립학교와 교구 부속학교에 보냈을 때 왜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연결되지 않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만들어 사립학교에 오기 전에 몸에 배어 있던 행동과 태도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p.419>
나는 교사의 역할이 사회의 문화적 차이를 부각시키는게(가정에서 부모가 이런 일을 할 수도 있다)아니라 그 차이를 사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교사가 해야 할 일은 공통의 목표를 제시하여 학생들이 서로 협력하게 하는 것이다.

12.성장

<p.424>
아이는 또래들과 비슷해지기를 원한다. 그중에서도 자신의 또래집단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아이를 닮고 싶어 한다.

<p.425>
아이에게 어른은 우리의 상위 버전이 아니다. 어른들은 단지 그들일 뿐이다.

<p.429~430>
성인식의 목적은 성인식을 할 나이의 아이들이 이전의 놀이집단에서 함께 벗어나 남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사회범주에 속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p.431>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구조는 그때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다. 나이 집단도 단순히 둘로만 나눌 수는 없게 됐다. 덩치는 어른만한데 어른은 아닌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아우르는 사회범주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십대다….결국 십대들의 집단성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나 선생, 경찰처럼 십대를 책임져야 하는 진짜 어른들이다.

<p.432>
아이는 어른들이 양육을 더 잘하게 만드는 쪽으로 진화했다… 어른 역시 자식을 잘 양육하도록 진해했다… 인간의 양육 본능은 매우 강력하다.

<p.433>
진화가 우리에게 선사한 어린 아이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어린아이는 우리 유전자를 갖고 있음은 물론, 작고 귀엽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대 자녀를 사랑해야할 이유는 한 가지만 얻었다. 우리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

십대들이 자신만의 나이 집단을 형성하면 십대 집단과 어른 집단 간에는 강한 적대심이 나타날 수 있다.

<p.435>
아이는 신체적으로 어른만큼 성장하고 부모 없이도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부모 눈앞에서 대 놓고 반항하기 시작한다…
열네 살이 되면 여자아이가 시집갈 준비를 하고 남자아이는 가정을 책임지고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사회에서는 반항아를 찾아볼 수가 없다. 반항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p.437>
문화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자신들의 나이 집단을 형성한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다. 집단성은 이들로 하여금 부모나 선생과는 차별화된 문화를 창조하게 한다.

<p.453>
청소년기가 있는 사회에서는 청소년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문명사회에서 어른들은 전문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에는 선택 가능한 전문 분야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청소년기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결정하는 시기다.

<p.454>
우리가 유년가와 청소년기에 또래집단 속에서 형성한 성격은 남은 생애동안 우리와 함께한다.

<p.455>
열일곱 살에너 스물다섯 살 사이 언젠가부터 “나”의 내면은 변화를 멈췄다. 변화를 멈춘 이유는 아마도 뇌가 완전히 성숙했기 때문일 것이다.


13.  역기능 가정과 문제아
<p.478>
연구자들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활용하는 데이터들은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를 보여 준다. 데이터는 특정 지표가 다른 지표와 함께 변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p.480>
중요한 건 이웃이지 가족이 아니다. 특정한 이웃 환경 안에서 아이를 관찰한다면 아버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큰 차이가 없다.

<p.491>
자녀 양육방식은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고, 조언 전문가들도 새롭게 등장한다. 새로 등장한 전문가들은 앞 세대 전문가들과의 차별점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장사를 해먹을 수 없다.

<p.493>
체벌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원인과 결과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p.505>
좋은 일들은 대개 함께 일어난다. 어떤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 다른 지능검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지능검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지능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다른 검사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게 한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나하면 둘 간의 관계는 상관관계이기 때문이다. 그 둘의 왜 상관관계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510>
나는 그들의 관찰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나는 관찰 내용을 해석하는 방식을 의심한다.

<p.511>
어째서 심리치료사는 부모의 잘못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는가?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p.515>
부모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삶이 부모 손에 맡겨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환자가 부모를  생각할 때에 어떤 강력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환자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14.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p.533>
스스로에 대해 너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 더욱 위험하다. 특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를 무적의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 문제다. 폭력은 낮은 자존감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론도 있지만, 최근에 이를 검토한 연구자들은 반대되는 결론을 낸다.

<p.534>
대학생을 연구한 결과, 부모로부터 편애를 받았다는 믿음과 높은 자존감을 갖는 것과는 대체로 관계가 없음이 드러났다. 이들은 자기 삶의 일정 영역에서만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있었으며, 연구자들은 그 영역을  “가정-부모관계“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오래 지속되는 자존감은 집단에서 개인이 차지한 지위의 결과다.

<p.535>
또래집단에서의 지위란 아주 우연히 결정된다.

<p.535>
자녀의 또래집단이 자녀에게 나쁜 꼬리표를 붙이는 걸 부모가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낮출 방법은 있다. 부모는 자녀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력을 갖고 있다. 부모는 자녀가 최대한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평범“은 아이에게 다른 아이들과 같은 종류의 옷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매력“은 피부가 좋지 않은 아이를 피부과에 데려가거나 치열이 불규칙한 아이에게 치아교정을 해주는 등의 일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달라 보이는 걸 원하지 않는다… 특이하다는 것은 또래집단에서는 미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p.537>
나는 인간의 마음에 관계를 담당하는 역역이 있어서 인생에 중요한 모든 관계의 작동모델을 관장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하지 않은 관계에는 일반화를 하고- 즉 또래 범주나 부하직원 범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같은 태도로 대하고- 이런 방식을 기본으로 설정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잘 알게 되면 우리는 그에게 고유한 작동모델을 부여한다.

<p.539>
많은 자녀 양육 지침서들은 당신과 자녀들이 집에서 좀 더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말해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책들은 모두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 그런 책들은 보통 아이들이 애초부터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으며, 대부분 쓰레기다.

<p.542>
부모란 양육을 즐길 수 있는 존재다. 양육을 즐기고 있지 않는다면 어쩌면 힘에 부칠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p.543>
부모가 자녀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책임지는 것도 그렇다. 오늘날 부모들은 전문가들의 말에 겁을 먹어서 부모로서의 권위를 드러내길 매우 망설인다. 그러다 보니 가정을 적절하게 꾸려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p.549>
조언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자녀를 사랑하되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하지 말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라. 양육을 즐겨라.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라. 긴장을 풀어라.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지는 당신이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았는지를 반영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녀를 완성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다. 자녀는 당신이 완성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것이다.


15.심판대에 선 양육가설
<p.561>
우리는 스스로의 특이함을 감추는 법을 배운다. 사회화를 통해 우리는 덜 이상해 보이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런 위장술도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약발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 사람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괴팍해지는 이유는 더 이상 특이함을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이하다고 해서 가혹한 형벌을 받지 않는다.

<p.566>
나는 사회 행동을 관장하는 인간의 마음에 최소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나는 개인 관계를 담당하고, 다른 하나는 집단 관계를 담당한다.

<p.567~568>
인간에게는 집단 관계와 개인 관계가 모두 중요하지만 어떻게 중요한지는 서로 다르다. 우리가 유년기에 또래들 사이에서 경험했던 것과 집에서 부모와의 관계 속에 경험했던 것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중요하게 작용한다.

<p.568>
유년기를 생각할 때 부모님이 떠오르는 건 개인 관계를 담당하는 마음 영역이 사고와 기억에서 정당한 몫 이상을 차지해 버린 탓이다.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 부모를 탓하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