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라는 시간, 육아 황금기
10월 마지막 금요일 퇴근 했더니 집엔 아들만 있었다.
10살 딸아이는 친구네 집으로 할로윈 파티를 갔고, 남편은 당직이였다.
아들과 둘이 조용히 밥을 먹고, 치우고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내 곁을 떠나서 각자의 사생활 영역에 들어가 있는 아이들이 신기했고
내 시간이 생겨서 너무 좋구나. 생각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
밥 9시30분쯤에 딸의 친구 집으로 딸을 데릴러 갔다.
나를 보고 신나서 달려나오는 딸을 보는데, 내 엔돌핀이 솟구치는게 느껴질 정도로 반가웠다.
딸과 둘이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딸은 나에게 오늘 하루가 얼마나 즐겁고 멋졌는지 조잘조잘 수다를 풀어놨다.
얘기하면서도 자신의 기쁨과 흥분이 흘러넘쳐서 혼자 폭소를 터트리기도 했다.
딸의 수다를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아이답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빨간머리 Anne 캐릭터가 우리 딸 속에 숨어사는구나 싶었고, 난 묵묵히 듣고 있는 Matthew가 된 기분이였다.)
우리 동 입구에서 우체통에 꽂힌 우편물을 챙기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딸이 나에게 안긴다.
똑바로 서서 안기면 이제 딸은 내 가슴에 키가 닿는다.
"엄마, 할로윈파티가 이제 지나가버려서 너무 속상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
뭔가를 기대하고 그 순간을 즐기고 지나간 순간을 아쉬워하는 그 마음이 나도 뭔지 잘 알것 같아서
자꾸만 이 아이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계획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집에 와서 우편물을 뜯었다가 깜짝 놀랐다.
어린이재단에서 온 10주년 감사장
내가 얼마씩을 기부하고 있는건 알고 있었지만(연말정산으로 확인되니깐), 근데 벌써 10년이나 되었다니!
그리고 저 10년전 날짜를 보고 생각이 났다.
둘째 임신 초기 무렵, 첫째는 곧 두돌을 앞둔 무렵 31살의 내 마음이 확 떠올랐다.
(순간 마음 속 타이머신 타고 2012년에 간 기분)
아무 생각없이 숙제하듯 애는 둘 낳아야지! 이런 말도 안되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지만
막상 이 험한 세상에 또 아이를 내놓는다는게 너무나 무모한 행동 같았다.
(그때 특히 중국발 미세먼지로 건강염려증이 극에 달하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 것 같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10년의 시간이 흘러서 내 뱃속의 작은 점이였던 그 아이가 10살이 되었다는게 너무 놀라웠다.
갑자기 우리 딸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 세월 체감이 안 되었다.
만 9년을 키워놓고도 그 시간들이 어디로 다 사라지고 이렇게 큰 아이가 눈 앞에 뚝 나타난 걸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찰라, 방에 있던 아들이 나와서 내 옆에 서더니 하는 말
"엄마 언제부터 나랑 키가 같았어? 나랑 키 똑같네?" 하며 자기 키를 자랑스러워 한다.
그 10년동안 아장아장 걷던 아들은 나 만큼 자라서 나랑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난 10년이 마치 5년을 압축한 듯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는게,
앞으로 시간이 흘러 또 10년 후에 저 감사장을 받을 무렵엔
지금 10살 귀여운 딸이 20살의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아들은 아마도 군대에 가 있으려나.
상상하다가 과거-현재-미래가 다 한순간에 보이는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미취학 아이를 키우는 회사 후배가 내가 아이들 얘기를 전혀 안하는 걸 보고 놀란다.
자기는 애 하나 키우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내가 애들 얘기를 안해서 애 없는 줄 알았다며.
나도 정말 힘들었다고 나는 어른들이 "애들 어릴 때가 제일 좋았다"고 말하는거 절대 이해가 안간다고
나는 내 아이들이 적당히 큰 지금이 제일 좋다고.
지금이 바로 나의 육아 황금기라고!
곧 애가 초등입학하면 앞으로 점점 편해지고 좋아질 거라며 위로 해줬다.
이 황금기에서 시간 딱 멈추고 싶지만, 그런 건 세상에 없다.
나는 이제 다가올 아이들의 사춘기(더불어 나의 갱년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그 시간을 잘 통과해서 20주년 감사장을 받을 행복한 2032년의 가을의 우리 가족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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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감사장에, 하필 깊어가는 가을 날씨에, 나는 엄청난 감상에 빠졌다(아직도 허우적대며 의미부여중)
토요일 저녁에 식구들과 식탁에 앉아서 10년후 자기 모습을 상상해보자고
분위기 잡다가 가족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김샜고,
나 혼자서 앞으로의 10년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