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이 소풍 가는 날, 김밥을 싸며
초3학년 딸 소풍가는 날
딸은 2013년생, 1학년을 코로나로 시작해서
3학년이 된 이제서야 소풍을 처음 가본다.
딸이 5살, 아들 8살때
아들의 첫소풍 도시락으로
소세지 문어를 싸준 적이 있었는데
(마침 휴직중이고, 첫 애라서 정성들였던 시절)
그때 딸은 오빠의 도시락을 부러워하면서 자기도 학교 다니면 꼭 이렇게 싸주라고 당부했었다.
그렇게 딸은 약 5년을 기다렸다.
딸은 소풍을 앞둔 일주일 전부터 너무 흥분했다.
그 설렘이 나에게도 전해져서 나도 소풍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저번주 아들이 수련회 가는 것도 얼마나 부러워하던지
그러면서 오빠는 코로나 때문에 5학년때 못 간 수련회를
자기는 5학년, 6학년 두번 갈거니까 얼마나 좋은지 자랑했다.
전날 준비물도 크게 없는데 가방을 꼼꼼히 싸고
잘 준비를 하면서 아침 7시에 꼭 깨워달라고
혹시나 자기가 짜증내도 꼭 깨우라며 당부를 하고 잠이 들었다.
(평소에는 7시 30분에 일어남)
아침 7시에 깨우니 벌떡 일어나서
"엄마! 드디어 오늘이야!" 외치며 신이 났다.
아침으로 차려놓은 김밥을 먹으며 내가 만든 도시락과
물을 가방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입었다.
학교를 가기까지 혼자 구름 위를 걷는 듯 행복해 보였다.
날씨가 추워져서 걸칠 옷을 찾아주는데
내 생각에 아들이 키가 커서 못 입게 된 작아진 얇은 점퍼가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빠 옷이라고 당연히 안 입겠지? 그래도 지금 기분 좋아보이니 한번 물어볼까?
oo아. 오늘 추운데 이거 오빠건데 여자도 같이 입는
스타일이거든, 엄마가 보기엔 오늘 날씨엔 이게 딱일것같아. 한번 입어만 볼까?
놀랍게도 일단 순순히 입어본다.
(설마 입어? 곧 싫다고 벗겠지 했다)
근데 그거 입고 간단다.
역시 마음이 행복하면 만사 오케이구나!
속으로 웃었다.
(남편에게 오늘 oo이가 오빠잠바 입고 갔다고 말했더니
남편도 놀랐다)
학교까지 배웅해 주려고 회사 출근시간을 한시간 미뤄놓고 딸의 아침 루틴을 지켜봐줬더니.
(밥 먹고 옷 입고 이 닦고 머리 빗고)
“ 엄마가 회사 늦게 가서 나 학교가는거 봐 주니깐 너무 좋아”
그래 엄마도 너무 좋다.
딸은 친구 만나서 같이 갈거라고 나보다 먼저 나갔다.
문 앞에서 같이 엘베를 기다려주는데
갑자기 서 있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 배에 얼굴을 묻고는
"엄마 기분이 이상해" 말했다.
너무너무 기다렸던 그 날(소풍)이 막상 오니깐
설레임이 폭발하면서도 그 반대감정인 불안감
소풍 별거 없을 거란 허무함. 그런 감정이 몰려온 건가?
추측해본다.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재밌을거야. 잘 다녀와. 인사하고 보냈다.
엘베 태워 내려보내고 집 베란다로 달려가서
딸이 나타날 때 까지 서서 기다렸다.
딸은 곧 내 시야에 들어왔고
친구를 발견하고 팔랑팔랑 뛰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났다.
딸이 집에서 출발한 건 7시 50분
난 집에서 9시에 나가면 되는 스케줄이였다.
아들은 차려놓은 밥 먹고 조용히 알아서 학교에 갔고
갑자기 생긴 자유로운 시간 커피한잔 내려서 마시면서
행복했다.
아!
이제 오늘 아침 내 김밥싸기 무용담 쏟아 내야지!
"나 오늘 5시에 일어나서 김밥 쌌잖아."
"결과물은 볼품 없지만 나 진짜 애썼지?"
"어서어서 우쮸쮸 칭찬을 해줘라."
이런 마음이였을 것이다.
남편과 엄마랑 여동생 있는 톡방, 친구 4명 톡방에
내 김밥 사진을 전송했다.
남편의 첫 마디는
"문어가 과음했어? 눈이 꽐라됐네”
엄마는 무반응, 여동생은 딴소리.
차례대로 애들 소풍 앞둔 워킹맘 내 친구들만이
나한테 고생했다고 잘 쌌다고 칭찬 해 줬다.
(이후 저 톡방에서 내 소세지문어와 눈이 정말
똑같은 도시락 사진이 올라왔다)
나중에 김펀칭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손재주도 없는데 회사라도 다니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우리끼리 자학도 했다.
우리 딸은 나랑 달리 손재주가 좋다.
다행이다.
딸이 기뻐하며 들고 간 내가 만든 도시락.
정신없는 와중에 인증용 생각해서 찍어뒀다.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김밥싸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엄마는 데코레이션이 젤 어려워. 딸아 기쁘게 가져가줘서 너무 고마워.
예전에 우리 엄마는 세명 김밥 싸며
점심에 김밥 먹을거니깐 아침은 그냥 밥을 먹겠다는 딸(나)때문에 얼마나 짜증났을까?
그리고 절대 김밥 꽁지도 안 먹었지!
우리애들도 김밥 끄트머리는 안 먹지만
두끼니쯤 김밥 줘도 즐겁게 먹어주니 고맙다.
출근 길에 김밥에 대한 여러 추억들이 불연속적으로 떠올랐고
나 요즘 꽤 잘 지내네? 싶었다.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제 남편이 어머님댁에 들러서 김치랑 데친 시금치를 가져왔다.
아마도 남편이 내일 내가 딸래미 소풍으로 김밥 싼다면서 시금치 못(안)샀다고 말을 했나보다
어머님께 전화로 데친 시금치 주셔서 김밥도 잘 쌌고 김치도 맛있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님은 안그래도 자기가 전화하려고 했다면서
"어쩜 출근하는 애가 아침에 김밥도 싸서 보냈냐며, 사서 보내지
너 너무 기특하다."
정말 폭풍칭찬을 하셔가지고 순식간에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던지
이 나이 먹고도 이런 칭찬에 아이처럼 신이 나는 내가 너무 웃겼다.
'네, 어머니 저 정말 너무 대단하죠?'
'저는 일하면서 애 소풍날 김밥도 손수 싸서 보내는 매우 부지런한 엄마입니다'
내 본심은 사실 이런 유치한 거였구나 부끄럽게 직시하게 됐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 엄마가 넘치도록 해줘서 그래서 내가 미친듯이 거부했던
모성=먹이기 공식을 반복하고 있는 건가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 안에는 소풍날 김밥을 사보내는 엄마들보다 내가 더 낫지하는 우월감도 있었지 싶다.
밥은 중요하지만 꼭 밥만 중요한게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퇴근해서 남편한테 오늘 김밥싼거 칭찬을 어머님께 받았다고 위에 어머님의 칭찬 멘트를 재현해줬다.
남편이 하는 말.
"우리 엄마 내가 집에서 콩비지찌개 끓인거 알면 울겠네" (그날 저녁 메뉴 : 콩비지)
"바쁘면 사보내는거지 꼭 집에서 김밥 쌀 필요있어?"
우리 어머님도 모성=먹이기 공식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분인데.
이 어머님 아들(내 남편)은 먹거리에 초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