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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번째 생일을 보내고

여름 날 2022. 2. 13. 11:00

40번째 생일 전야제 



10대와 20대 시절엔 내 생일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했다.
남들도 다 그랬지만, 난 남들보다 최소 두배는 더 크게 의미부여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철이 없어서 그랬겠지 싶다.
내 생일인 그 날의 24시간이 사라지는게 어찌나 아쉽던지
앞으로 매년 그 날이 오는 걸 자각 못 했던건지 생일만 사는 아이처럼 요란하게도 생일에 열광했다.
아마 내가 20대 시절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하고 상상하기도 싫다.

30대에도 의미부여는 여전했지만, 물질적 보상에 치중했다.
매년 더 높은 금액의 셀프생일 선물을 하면서 내 생일이니까 하며 과소비에 대한 죄책감을 억눌렀다.
내 생일 있는 2월은 소비의 달, 모든 명목은 다 생일이니깐!

그런데 30살을 넘어가면서 부터는 남들의 축하는 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우리엄마나 시댁에서 내 생일이라면서 챙겨주시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난 나 스스로 내 생일 알아서 잘 챙기고 있으니 제발 관심 꺼주세요 하는 심정이었다.

특히 우리 친정은 모든 가족이 모여서 생일파티하는 전통이 있어서
엄마의 자식3명과 그들의 배우자 3명, 그들의 자녀까지 이제 총 5명 합이 12명
매월 누군가의 생일이거나 명절이거나 어버이날이거나
모여서 밥 먹을 일들이 너무너무 많다.

이 모든 문제를 사회적 거리두기가 싹 해결해 줘서 최근 평화로운 생일을 보냈지만
생일상을 차려주지 못한 미안함을 표현하셔서 그거에 괜찮다고 대꾸하는 것도 짜증이 날때도 있었다.
난 왜 이렇게 이기적이고 못됐나 하는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서 기분은 더욱 악순환이였다.

난 도대체 왜 이럴까? 밥 한끼 먹는게 뭐라고, 내 생일 축하 해준다는데. 성격이 왜 이리 모났을까?
쓰고 보니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같지만, 난 정말 내 생일 핑계로 복작되는게 그땐 너무 싫었다.
적당히 친한 애매한,, 사람들이 보내주는 기프티콘도 너무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이런 내 성격을 남친 시절부터 겪어 온 남편
매년 내 생일마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아무것도 준비 안하는 남편에게
10년 동안 매년 받고 싶은 선물로 손편지를 요구했더니
딱 10년째에 5줄짜리 손편지(라고 하기엔 애매한 쪽지)를 줬다.

어쨌든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최근엔 특히 올해는 더더욱
내가 원하는 걸 정확하게 미리 얘기 해줬고 그런 과정에서 마음이 편했고
저절로 내가 얼마나 많이 사랑받고 있고 행복한 사람인지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남편에겐 "이번 생일엔 전복미역국이랑 전복버터구이 해줘"

며느리 생일 상 너무 차려주고 싶어하시는 우리 어머님께는
"어머님 저는 소고기 미역국, 잡채랑 소불고기 먹고 싶어요. 딱 이렇게 세개만 해주세요"

첫째 딸인 나를 제일 사랑하고 어려워하는 우리 엄마에게는
설음식 겸해서 생일 퉁치자는 의미로, 만두, 유부주머니, 잡채, 녹두전, 탕국을 주문
(쓰고 보니 우리 엄마한테 젤 많은 걸 요구했다는 걸 알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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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내 생일무렵
엄마는 저 음식 그대로 매우 푸짐하게 해주셨고,
나는 엄마가 생일파티 하자고 말 꺼내기도 전에 내가 스스로 케이크를 사서 엄마집에 가서
미리 생일파티를 하게 해 드렸다. (올해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내가 케이크를 사서 생파 하자고 한게 변화)
엄마도 내 눈치 보지않고 얼떨결에 내 생일 축하하고 끝.
그동안 딸 생일에 뭐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사셨던게 이제 이해가 된다.

그리고 시댁
거리두기 해야하니깐 설날에 오지말라고 하시면서(어머님 아버님, 우리 4식구 하면 딱 6인임에도)
설 전날에 우리집 주차장으로 손만두, 떡, 갈비 다 싸다가 배달 해주시고
주차장에서 애들 세뱃돈까지 챙겨주시고 딱 5분만에 돌아가셨던
방역수칙 준수 모범 시민이자 며느리 의사 최대 존중해주시는 넘 고마운 시부모님

코로나 무섭지만 내 생일상은 꼭 차려주고 싶으시다는 우리 어머님
그래서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미리 메뉴 정해드리고 시댁에 생일상 받으러 가는 날이였다.
그런데, 우리 애들이 다 친구들이랑 놀아야 된다면서 안가겠다고 해서 나랑 남편만 점심먹고 왔다.
애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안따라오게 된거냐며,, 기분 묘했고

어머님 아버님이랑 나랑 남편 4명이서 조촐하게 생일 파티하니깐 나 이 집에 새로 시집 온 느낌?
애들 없으니 너무 어색해서 1시간 만에 퇴장해서 집에 오는 길에
내가 앞으로 이 두분을 볼 날이 30번은 될까 싶어서 눈물나던 묘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며느리 생일 상 차린다고 어머님은 장보고 음식만들고
아버님은 굳이 케이크 사러 나가셔서 그 많은 케이크 중에서
특별히 어떤 것을 고르고(그냥 고른게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 고른 그 케이크) 하신 것을 상상해보니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내가 이 두분에게 얼마나 감사해야할지 저절로 깨닿게 된 시간이였다.

그리고 우리 네식구가 보낸 생일
우리 아들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오더니
엄마 생일 축하해~ 해주고 내가 기뻐서 엉덩이 두드리는 것을 허락해 줬다.(평소엔 기겁하고 날 변태 취급)
그리고 청소기 돌려주기(평소에도 청소기 돌리고 빨래개고 정리 다 하지만, 특별히 자발적으로 구석구석 열심히)

남편은 전복구이와 전복된장찌개를 끓여서 상을 차려줬다.
전복을 언제 사왔나 했더니, 일부러 수산물 시장까지 가서 전복을 사왔다고.
전복손질과정이 너무너무 힘들었다며 다시는 안하겠다며(그러면서 전복손실 이미 5번도 더 넘게 하고 있음)
그러나 딸이 너무 잘 먹기 때문에 조만간 또 수산시장 갈 것 같다고 내가 예언하면서 즐겁게 저녁 먹고 생일 축하.
이 모든게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행복감 충만했던 저녁이였다.

또.. 우리 딸
내가 맨날 남편한테 손편지 써달라고 하고 돈 없다고 남편에게 투덜대서 인지..
우리 딸이 아빠 대신 써준 생일 카드, 맞춤법 틀린거 너무 귀엽다(학교에서 최고 모범생의 숨은 한글 맞춤법의 실체)

평소 용돈을 모으면 소중하게 모으는 딸이기에
얘가 나에게 오만원이나 담아서 준것은 엄청나게 큰 결심인걸 잘 알수 있다.
나에게 생일선물로 5만원이나 줬지만, 이제 자기 자산이 줄었다는 상실감에 우울해하더니
갑자기 "엄마 아빠는 왜 설날에 나한테 세뱃돈 안준거야?" 하면서 어서 세뱃돈을 달라고, 귀여운 억지를 부렸다.

초2 딸의 생일카드
열어보시오 칸에는 현금 5만원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끝으로 지인들의 생일 축하
내 친한 친구들은 서로 이런거 안 챙긴지 오래됐지만
그럼에도 굳이 기프티콘 보내주는 고마운 사람들, 올해부턴 아무런 부담없이 진심으로 고마워졌다.

특히 인간관계의 권력관계(?)에서 내가 강자인게 뻔한 사람한테 받는 선물들이 너무 부담스럽고,
선물 주는 사람의 심리적 배경이나 무의식이 인식되어 너무 불편하고 또 가끔은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굳이 그 사람 생일 기억해서 되갚기 하는게 너무 귀찮았다.
이젠 그런 걸 떠나서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기로 했다.
내가 그 사람 생일 까먹어서 못챙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마흔번째 생일이라서 또 의미부여 한거지만,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사랑받는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
오늘의 이 마음을 수시로 되새김질 하면서 감사히 살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