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살아있는 날의 시작

여름 날 2022. 1. 12. 06:17

박완서선생님의 책을 읽는 시기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마음이 안 잡히고 생각이 많아 질 때인것 같다.
아무래도 작년 말쯤 코로나 확진자 폭증에 따른 불안감도 한 몫 한 것 같다.
작년 초에도 나목을 비롯해서 몇권을 읽었는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이불 속이 너무 좋아지면서 전자책과 더욱 한몸이 되어 보냈다.

세계사에서 박완서 결정판 소설전집이 나왔을때
종이 책으로 살까 하고 잠시 고민을 했었다.
순전히 소장욕구때문이였는데, 지나고 보니 안사길 너무 잘했다 싶다.
어느 날엔가 정기구독하는 사이트에 결정판 전체가 업데이트 된 걸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안 읽은 것들을 골라서 읽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아주 오래된 농담'(이건 20대때 분명히 읽었지만, 기억나는건 능소화라는 꽃뿐 줄거리가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목마른 계절'등을 읽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읽은 게 '살아있는 날의 시작'이였다. 앞에 책들에서도 읽으면서 여기저기 책갈피를 해놨고 이용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밑줄긋기를 어딘가로 옮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 천천히 읽기가 전혀 안되는 몰아치는 독서에 나도 피곤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전자책 표지


그 중에서 '살아있는 날의 시작' 을 읽는데 막장 드라마 한편 보듯, 고구마 백개 먹은 듯한 답답함이 몰려와서
엄청 힘들었다. 1980년도에 동아일보 연재 당시에도 미풍양속을 함부로 파괴하고 있다는 독자들의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는 작품으로 이런 막장 환장 80년대 이전의 이야기는 그 앞에 책들인 도시의 흉년이나 휘청거리는 오후에서도 나타났지만 이 책이 나에게 더 힘들게 느껴졌던건 주인공의 나이에 내가 가까워져서 인가? 생각해봤다.
40대 일하는 여성, 아내, 엄마, 그리고 누군가의 자식으로서의 삶을 다각도로 볼 수 있었던 책이였다.

주인공은 일하는 여성이자 아내이자 엄마인데 젊지도 늙지도 않은 40대로 표현된다.
소설 시작부분이였는데 40대에 대한 표현이 지금의 딱 내 얘기 같아서 노추의 예감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 여자의 앞모습과 뒷모습은 판이했다. 군살이 붙지않은 우아하고도 간결한 선과 자신 있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하여 뒤에서 본 그 여자는 스무 살을 갓 넘어선 것처럼 싱싱해 보였다.
그러나 그 여자의 앞모습엔 분명하고도 멀지 않은 노추의 예감 같은게 서려있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옛날 버전을 보는 듯한 자식 교육에 대한 맹목적인 세태를 묘사하는 부분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지만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채 회피하며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망만하는 내모습이 느껴졌다.

..그래서 자식을 거기 내 맡겨 번호로 명명되길 원치 않았고,
그 당시엔 남이 뭐라든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게 확실했었다.
그러나 그 후 그런 확신은 자주 흔들렸다. 아무리 옳지 못한 것이라도 모든 사람이 하고 있을 때는
그걸 안 하는 게 오히려 옳지 못한 짓이라는 착란에 그 여자는 자주 빠지곤 했다.
그리고 옳지 못한 짓을 안 할 자유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 여자의 엄마 노릇이 빠져든 기묘한 함정이었다.
자기 아니라도 엄마들은 누구나 제각기 자식들을 위한 답시고
요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명백히 알고 있고 그것 때문에 적지 않이 고민하고
개탄하고 있음을 그 여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하나하나의 엄마가 모여 모든 엄마가 됐을 때 그 명백한 잘못은 걷잡을 수 없이 큰 힘이 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거기 동조 안하는 쪽을 오히려 부당하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란 하나하나가 모여 되었으련만 하나하나의 뜻과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 되어 있다는,
그 사이의 엄청난 착오에서 그 여자는 헤어나지 못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엄마 노릇에 대한 불안감과 열패감에 짓눌렸다.


내가 최근에 마주한 현실 중의 하나는
알고 있었지만, 당장 나에게 닥친 일은 아니기에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던 문제.
자식으로서 늙어가는 부모를 케어하다가 결국 죽음을 지켜봐야 된다는 것이다.

아직 양가 부모님은 건강하시지만, 내 가까운 친구들이 이 상황에 직면한 것을 지켜보면서
그 어려움을 간접체험하고 있다. 형제간의 부양 의무 분담에 대한 의견차이부터 차도 없는 병간호까지
화나고 슬프면서,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내야하는 사정을 듣다보면,
부모님이 건강하신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임을 매일 인식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부모님의 노년과 죽음, 그런 순간에 대한
대비를 해보게 되었다.

우린 누구나 양로원이라면 치를 떠니까, 치가 떨리게 비참한 양로원밖에 못 갖는다곤 생각 안 해요?
양로원 소리에 치를 떨지 않는 나라에선 분명히 치가 떨리지 않는 양로원이 있을 거예요.
양로원에도 꿈을 거는 나라엔 꿈이 있는 양로원이 있을 테고요.
그래서 남의 이목을 의식 할 필요 없이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갈걸요.

남의 어머니한테 효성이 우러난다는 건 거짓말이고요.
그렇지만 효도 말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엔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축복스럽게도.... 남자들이 효도라는 걸로 억압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의 고부간은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졌을걸

 

미소가 사라진 어머니의 얼굴은 조막만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폐허처럼 끝 간 데 없이 쓸쓸했다.
오로지 종적인 인간관계에 생애를 건 어머니,
젊은 날은 그런 관계의 지고의 이상인 효를 몸소 실천하는 데 비치고,
훗날 반드시 효로써 보상받게 되리라는 걸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가 어이없이 허탕치고,
지금 달랠 길 없는 배신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탄생과 사망은 정반대되는 일 같으면서도 닮은 데가 있어요.
그걸 지키고 도와준 사람에게 해방감과 완성감을 주거든요.
어머니는 고통을 잘 이기시고 마지막엔 아주 편해지셔서 곱게 운명하셨어요.주름살이 다 펴지는 것 같아지면서 곱게 운명하셨어요. 꽃같이 아름다웠어요.전 큰일을 해낸 것처럼 보람과 슬픔을 느꼈어요. 슬픔은 오히려 그 다음이었어요.



아내역할에 대한 것은 지금 2020년대에서,
최소한 내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이해가 안가는
저런 시절도 있었더라 정도로 생각되지만, 그 시절 이런 글을 써내신 작가님의 통찰과 용기가 매우 놀라웠다.

나는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중학교때 담임 선생님이 떠오른다.
담임 선생님은 가정선생님이셨는데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들에게(성적표에 '양' '가'가 많은 학생들)
양갓집 규수라느니, 나중에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농담하셨던게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대한 믿음은 한 여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는 상관없는
현모양처라는 유구한 고정관념에 대한 응석에 지나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는 나서부터 이날 이때 현모양처에 편안히 길들여지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로 그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마치 포대기에 싸인 아기 넘기듯이 그의 재롱과 버릇을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넘겨주면서
행여 그걸 다칠세라 소홀히 할세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그의 어머니도 현모양처였고 그의 아내도 현모양처였다.
그래서 당연히 궂은 일은 그 여자들의 몫이었고, 좋은 일은 그의 몫이었다.
거친 음식은 그 여자들의 것이었고,맛있는 음식은 그의 것이었다.
진자리, 차가운 자리는 그 여자들의 것이었고, 마른자리, 따뜻한 자리는 그의 것이었다.
그들이 같이 낳은 아기도 벙글벙글 재롱 피울 땐 그가 안았고, 보채거나 똥 싸면 당장 그 여자들의 품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현모양처는 꾸준히 그를 궂은일, 어려운 일, 싫은 일로부터 보호해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