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키우기/읽어주기

8월 함께 읽은 책

여름 날 2021. 9. 14. 20:49

매월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을 월별로 정리하기로 했다.

9월이 시작된지 한참 되었지만, 그때의 감상평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1. 장화 홍련전

 

어릴 때는 무서운 얘기에 엄청난 호기심이 생긴다.

읽고 나서 밤마다 잠을 설치고 화장실 가기도 무서워하면서도

공포특급, 전설의 고향, 괴담에 대한 궁금증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우리 아이들도 역시 괴담과 무서운 얘기를 좋아한다.

신비아파트에 열광했고, 내가 장화 홍련전에 무서운 얘기라며 미리 운을 띄울 때도

매우 기대를 했다. 난 장화 홍련전을 읽은 적이 없었고 납량특집으로 제작되는 티비 드라마로 봤던 기억만 있는데

드라마의 시작은 늘 새로 부임한 사또마다 부임 첫날 밤에 귀신을 보고 놀라서 죽어나가는 거였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귀신이 나오는 얘기로 알고 있었다.

 

아이들도 귀신 나오는 얘기라는 나의 스포일러 제공에 귀신 언제 나오는거냐면서 엄청 성화를 해대서

귀신 나오는데까지 읽다가 100쪽이나 되는 분량을 하루에 다 읽어주느라 애먹었다.

내가 절반쯤 읽고 남편이 나머지를 읽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읽으면서 도저히 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나와서 참 난감했다.

특히 처녀가 임신하고 애를 낳아 집안의 흉이 잡힐까봐 딸을 물에 빠트리게 되는 줄거리에서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할지 당황스러웠다. 

읽는 내내 계모를 너무 무시무시하게 그려냈고, 그런 걸 전혀 눈치 못채는 아빠가 어이없게 기막혔다.

 

21세기를 사는 어른인 내 시선에선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였고

권선징악이 주제라기보단 말도 안되는 남성중심 사회를 간접체험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귀신나오는 장면이 하나도 안무서워서 아이들은 약간 실망했다.

이어서 나오는 콩쥐팥쥐도 이미 아는 내용이었지만, 아마 대부분의 동화에선 원님과 결혼하고 사는 걸로 끝나는데

실제 고전의 결말은 그 이후 얘기가 더 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다.

 

인생이 또 책이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거나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 고전시리즈는 당분간 애들에게 읽어주진 않을 것 같다.

 

 

 

2. 사랑의 학교

 

 

내가 4학년때 정확히 나도 지경사 버전의 "사랑의 학교"를 읽었다. 책의 표지도 떠오르는데 이거랑은 달랐던 것 같다.

다시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며 초등학교 4학년의 나와 만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 책에서 나오는 이탈리아의 지명들 특히 '피렌체'의 발음에서 나는 생애 최초로 이국적이다! 라는 기분을 느낀 것 같다.

사는 동안 내내 피렌체라는 지명에 어떤 향수(?)를 느꼈는데 이번에 완벽하게 의식으로 끌어내온 기분이였다.

또 이달의 이야기로 나오는 '난파선'부분을 다시 읽는데 딱 타이타닉 침몰하는 장면이랑 비슷한 묘사에

내가 고등학교때 타이타닉을 보면서 아! 이 책을 생각했구나하고 깨달았다.

 

성인이 읽기엔 너무 교훈적이라 유치하지만, 마차가 이동수단이였던 19세기에 쓰여진 책임에도

아이들에게 읽어주기엔 너무 좋은 책이였다. 

이 책이 200페이지 가량되고 중간에 휴가다녀오느라 엄청 늘어지게 읽어주게 되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름도 매우 생소함에도 아이들이 등장인물의 이름과 특징을 기억해 내서

매우 놀라웠다.(너희들 천재아니냐? 마구 칭찬해줬다)

 

 

3.벌렁코 할아버지

 

초등학교 3학년때 담임 선생님이 몽실언니와 벌렁코 할아버지 두권을 선물해 주셨다.

내 기억에 책 선물 받은 사람은 나뿐이였나 싶게 날 예뻐해주신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도서관엔 내가 가지고 있던 초판버전의 누런표지의 책도 있었지만, 좀 더 새책을 빌리고 보니

익숙한 삽화가 이름까지 발견했다.

 

초등3학년의 나는 몽실언니를 읽었고 이 책을 직접 읽은 기억은 없지만, 아빠가 나에게 이 책을 읽어준 기억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책이 떠올라서 도서관에 검색을 했다. 그래서 대출했고

내 기억이 맞는지 이 책을 혼자 읽다가 몇개는 아이들에게 읽어줬는데

전반적으로 너무 어둡고 한의 정서랄까 그런게 깔려 있어서 아이들에게 다 읽어 줄 수 없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것은 오로지 아빠가 읽어준 이 책의 내용이 모두 내 머릿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였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이무기가 나오는 부분은 '살꽃 이야기'였는데

다시 읽다보니 책에 나오는 남북통일의 은유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내가 두려워했던 이무기가 사실은 분단의 상징이였는데, 그 시절 우리 아빠도 이 은유를 알고 계셨던 걸까.

 

1953년생, 정전이 되자마자 태어나신 아빠가 겪은 그 시절이 얘기가 잔득 실린 이 책을

나에게 읽어주시면서 어떤 기분이셨을지,

그 때의 아빠랑 거의 비슷하게 나이 먹은 내가 다시 그 책을 읽는 기분이

너무 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침 이 책을 읽던 시기가 광복절 직후였고 방구석 미술관 한국편을 읽으며 초반 챕터마다 눈물 쏟고 있었고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식을 보면서도 한바탕 눈물 바람을 하던 시기여서 더욱 감정이 휘몰아치게 한 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