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보기
지난 연말에 이직에 실패했고 남동생이랑 싸운 일로 심각한 감정소모를 했고 무기력에 빠졌었다. 새해를 기점으로 다 떨치고 일어나리라 다짐했다.
1월 중순쯤에 회사에서 직무교육 강사 제안을 받았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제안을 받자마자 수락했다. 그런데 그 2시간짜리 강의를 수락하자마자 난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꼈다. 한달 후 강의였지만 자료 제출은 3일만 남은 상황이었다. 마음이 너무 조급해졌고 압박감을 날려버리려고 바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머릿속으로 바쁘게 일을 했다. 그때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들이 마구마구 떠다니고 있었다. 지난번 누가 만든 강의안을 떠올리며 일단 시간이 없으니 그걸 내 스타일로 다시 고치고, 언제까지 자료를 만들어서 제출하고 그러려면 오늘 밤에 다 만들어야겠군, 영상자료가 뭐뭐 있더라?
난 이걸 수준급으로 아주아주 잘해서 강의 잘한다는 평판을 꼭 얻고 싶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짠! 하고 모두를 놀래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 평판을 갖기 위해 내가 나 스스로를 얼마나 닦달하고 괴롭힐지가 너무 예상이 되었다. 시작도 전에 그 과정을 견뎌낼지 너무 두려웠다. 마침 그날 같이 집에 있었던 남편은 나의 난리굿(?) 안달복달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너 그거 하면 월급 더 받아?” / “아니”
“그럼 더 빨리 승진 시켜줘?” / “아니”
“그런데 왜 해? 왜 사서 고생해?”/ ............... 그러게.. 음 성취감? 느끼고 싶어서...
그러게!! 나는 그걸 왜 한다고 했을까? 왜 사서 고생을 하려는 걸까?
우리 남편은 어쩜 저렇게 명쾌할까? 이런 생각의 경로를 거쳐서
나는 2시간 만에 제안해준 담당자에게 강의 못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내가 아니면 할 사람들은 또 있었기 때문에, 그 강의 제안은 다른 사람에게 갔다.
그러나, 이 거절 이후에 나는 꽤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 그래 잘했어. 괜히 그거 준비한다고 스트레스 받으면 애들이나 잡을 게 뻔해!
다른 내 스케줄도 엉망이 될 거고!
점심이나 맛있게 먹고 잊자! 다짐하며 4식구 먹을 라면을 끓였는데,
라면을 한 젓가락 먹은 딸이 “라면이 불었네” 혼잣말을 했다.
그때 바로 이어서 남편이 “엄마는 원래 라면을 잘 못 끓여” 이 한마디를 했다.
난는 “엄마는 라면을 잘 못 끓여”에 완전 대폭발을 하고 말았다.
“그래 나 라면 못 끓인다! 먹지마! 내가 다 먹을 거야!”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며, 다들 내 눈치를 보다가 조금 먹다 말았고.
나 혼자서 꾸역꾸역 먹다가 남은 라면을 버리게 되었다.
모든게 다 지나고 나서 이 때 상황을 돌아보면 참 어이가 없지만,
그 당시에 나는 난 겨우 라면도 못 끓이는 존재니, 강의 같은 걸 잘 할 리가 없지 하는 비약을 거쳐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일 못한다고 거절하고 자존심 상해서는 엄한 식구들한테 화를 내는 내 자신이 정말 너무 싫었다.
당시 상담사에게 그 날의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 때 내가 받은 피드백은 이러했다.
1. 잘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건 좋은 거다.
2. 그런데 혹시 단순한 인정욕구는 아닌지 잘 살펴보자.
3. 그리고 왠지, 당신은 엄청 놀고 싶어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동안 생각해봤다.
내가 잘 하고 싶은 것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정말 잘 하고 싶다. 명강사처럼 자연스럽고 재치있게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 싶다. 그래서 강의를 잘 한다는 평판을 얻고 싶다. 또 내가 무대체질이여서그 일이 정말 좋고 큰 성취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평소에도 20분 짜리 직원교육을 하려면 자료를 만든 다음에 구어체로 시나리오를 쓰고 또 그걸 대본처럼 읽어서 녹음까지 하면서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도 발표 할 때 내 목소리가 떨리는게 느껴지면, 또 하나의 흑역사가 추가된 기억도 몇 번 있는데, 그럼 그 다음엔 그 두배로 연습을 해야한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교육이 좀 만족스러워서 계속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정말 잘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 일이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서 할 만큼 내 인생에 내 경력에 도움이 될 일인가? 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왜 그걸 잘 하고 싶은 걸까? 생각 해 볼수록, 이건 인정욕구랑 연결된다.
2. 나의 인정 욕구
나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 너무 중요하다.
시선이 온통 외부에 있다. 내가 외부 사람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에 스스로를 많이 괴롭히면서 살고 있다. 이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 나 자신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담가는 나에게 그런 시선을 나의 내부로 돌려서, 내가 무엇을 할 때 정말 행복하고 좋은지, 어떤 장소를 좋아하는지, 무엇을 먹을 때 맛있다고 느끼는지를 찾아봐야 한다고 했다. 이런 조언들은 온 세상에 널려있지만, 난 한번도 제대로 내 마음을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다. 늘 내 선택에 자신이 없었고 남들이 좋아하는 걸 따라서 좋아했던 것 같다.
3.놀아보기
내가 좋아하는 걸 찾으려면 일단은 좀 놀아보라고 했다. 책도 좀 그만 읽고, 이유 없이 열심히 사는 것도(미라클 모닝한다고 일찍 일어나기, 운동하기, 일기쓰기) 하지 말고 그냥 놀아보라고 이렇게 게으름피우는 것도 다 능력이다. 그래서 한 동안 놀았다(기 보단 아무것도 안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를 놓지 못했기 때문에, 책 읽기는 내 놀이임을 깨달았다.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라는 깨달음과 함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3월을 이제는 다르게 보내보려고 다짐하며 봄을 타며 지내고 있다.
그렇게 놀아보기 모드(자아탐색 모드)로 살던 오늘 낮에
나는 또 그 강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나는 아직 위의 놀아보기가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거절했다.
“저 그거 못해요, 그거 하느라 다른 일 미루고 싶지 않아요”
이번엔 거절 후에 어떤 자괴감도 남지 않았다.
그냥 지금 난 그걸 할 수 없는 사람인 걸 바로 인정했다.
그 기회를 누가 갖게 되든, 그 기회로 그 누군가가 인정을 받든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온 가족이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